칼럼-편집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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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07.10 1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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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의 고통을 견디는 법

-편집국에서-

정호승 시인의 고통을 견디는 법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인가?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조금만 있으면 절로 그 포도를 따 먹을 계절이 오는 것인가?
그리 쉽게 달콤한 포도가 익어가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서민들에게 칠월은 아직 작열하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고통의 시절을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다. 사방이 경기 침체로 아우성이고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여성과 노인층은 희망을 찾기 위해 안달이고 직장인들은 자리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기를 쓴다.
어느 인문학에서 정호승 시인(1950년 경남 하동 출신)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에게 햇빛이 필요합니까, 그늘이 필요합니까?”
참 생뚱맞은 질문이다. 아무도 쉽게 답을 못한다.
그러자 본인이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라고.
그렇다.
인생에 한쪽 면인 그늘만을 취할 수도 없고 햇빛만을 취할 수도 없다. 이 두 가지는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비칠 때 그늘은 위력을 발휘한다. 반대로 그늘만 계속되는 음지나 지하에서는 그늘의 의미는 하나도 없다.
햇빛을 햇빛이게 하는 것은 햇빛이 아니고, 그늘일 수 있다. 만일 햇빛만 있다면 그 밝고 환한 덕성이 차별화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슬픔과 고통이 없으면 진정한 기쁨과 행복도 있을 수 없다. 기쁨과 행복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은 슬픔과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슬픔과 고통을 극복한 사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호승 시인은 화두를 던진다.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통은 극복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삶을 살아갈 때 수많은 고통에 봉착한다. 가정과 형제 사이에, 직장 관계에, 사회인과의 관계 형성에서 나의 욕망과 남의 주장이 수시로 대립하고 있음을 체감한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사랑과 미움, 다가옴과 떠남, 승진과 탈락, 당선과 낙선, 이해와 고집, 금전을 둘러싼 갈등 등 수많은 요소들이 우리를 절망과 고통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통의 인자들이 막상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어쩔 것인가.
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고통을 극복하고 뛰어넘으라는 이야기들을 한다.
고통을 극복한다는 것은 보통의 경우에 고통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의미인데, 그러려면 극복의 대상을 부정하고 파괴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될 말인가.
나에게 다가온 고통이 눈앞에 펼쳐진 엄연한 현실인데 어떻게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울부짖는다 하더라도 고통에서 피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방법은 그 고통으로부터 눈을 감는 자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은 말한다.
고통은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견디는 것이라고.
아무리 고통이 크고, 파도처럼 밀려와도 견디면 견딜 수 있는 것이라고.
인생의 의미는 극복의 경험이 아니고 견딤의 경험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저 깊은 바다 속의 진주조개는 고통을 품고 나서 진주를 만든다. 고통 없는 진주는 없다. 모래알이 진주조개의 살갗에 침투해 남긴 상처를 안고 성장할 때 진주가 만들어진다. 우리들이 보배로 여기는 영롱한 진주는 진주조개의 아픈 고통의 견딤의 산물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고통의 시대나 슬럼프가 있기 마련이다. 때로는 인생이 작살나는 것처럼 아픈 고통이 짓누를 수도 있다. 하지만 견디며 사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만약 내 인생이 산산조각이 난다면 나는 그냥 산산조각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산산조각이 나는 인생으로 살면 된다. 물론 그게 최종 목적은 아닐 것이다. 견디다 보면 그 상처는 아물게 된다.
우리가 살다가 절망에 빠지는 순간 ‘네 인생에 바닥까지 굴러 떨어졌구나’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바닥은 부정과 원망의 대상이 아니다. 감사의 대상이다. 만약 바닥이 없다면 어쩔 것인가. 한없이 더 떨어질 것 아닌가. 어둠의 심연으로 끝없이 빠져들 때 그 바닥이 나를 구해 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
바닥까지 와 버린 상황은 이제 더 이상 밑의 바닥은 없는 것이다. 이제는 딛고 일어설 일만 있는 것이다. 바닥없는 인생은 없다. 등산하여 정상에 오를 때 산 중턱에서부터 시작한 사람은 없다. 누구나 밑바닥부터 시작한 것이다.
바닥이 있기 때문에 정상이 있는 것이며 바닥에서부터 힘들게 오를 때 정상의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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