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 최현웅 기자
  • 승인 2018.07.17 14: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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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찾은 편백향 가득한 어릴적 그곳
‘장성하면 축령산’ 전 국민이 알아줬으면...
귀촌, 농사는 못 지어도 잘하는 것 개발해야
북일 문암2리 금곡마을(영화마을) 황원일 이장
북일 금곡마을 황원일 이장이 영화마을을 설명하고 있다.
북일 금곡마을 황원일 이장이 영화마을을 설명하고 있다.

“산 좋고 물 맑고 풍광까지 좋아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항상 가슴속에 고향마을을 간직하고 살았어요. 특히 전국 어디에 내놔도 남부럽지 않을 편백나무 숲을 간직한 우리 마을은 떠올리기만 해도 언제나 마음의 위안이 돼 주었지요.”

숨 막힐 듯 바쁜 서울생활을 접고 어릴 적 추억이 담긴 고향에 정착한지 5년차 접어든다는 황원일(58)이장은 어려운 형편에도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서울과 장성을 오가면서도 고향땅을 팔지 않고 간직했던 아버님의 혜안 덕분에 다시 고향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돼 감사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서울로 이주했기에 농사는커녕 낫이며 호미 한번 쥐어본 적 없다는 황원일 이장은 고향이 그리워 무작정 옛집을 찾아 내려왔지만 처음엔 막막하기만 했다고 한다.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농사일도 쉽사리 접근할 수 없었을 뿐더러 외진 시골에 와서 마땅한 수입원을 마련키가 녹록치 않았다고 한다. 고민 끝에 서울에서의 사업경험을 살려 편백나무를 이용한 생활용품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전남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주관하는 아이디어 공모전에 출품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사업아이템이 채택되어 1천 여 만 원에 달하는 사업지원자금을 타내게 됐다고 한다. 이때 특허도 인정받았다. 황 이장에 따르면 특허도 특허지만 무엇보다 장성편백을 전국에 알리는데 이바지할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니겠느냐며 고향 장성과 편백향 가득한 축령산이 전 국민 모두가 알아주는 명품 브랜드로 하루빨리 인식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황 이장은 귀농·귀촌을 꿈꾸는 이들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라며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서 수익을 창출하는 방안을 찾지 못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이어 “농사만 하더라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준비하며 부지런을 떨어도 부족하고 외로운 것이 귀농·귀촌이라며 신중하게 고민한 후 결정해야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금곡마을은 예부터 뛰어난 풍광으로 인해 외지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을 비롯해 `내 마음의 풍금' `침향' TV 드라마 `왕초' 등이 여기서 촬영됐다. 또 황순칠 화백은 이곳 풍경을 소재로 `고인돌 마을'이란 작품을 그려 199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을 받았다. 지금도 옛 시골모습을 담으려는 화가, 사진작가, 영상작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6월에는 웹툰드라마 ‘계룡선녀전’을 이곳 마을에서 촬영해 가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 '만남의 광장' 촬영 당시 무대였던 주택.
영화 '만남의 광장' 촬영 당시 무대였던 주택.

병풍처럼 둘러싼 편백향 가득 축령산

금곡마을은 인근 축령산의 수려한 숲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이 숲은 2000년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다. 숲은 온통 편백나무·삼나무로 빽빽하다. 키가 20~30m나 되는 40~50년생도 수백만 그루. 나무들이 우뚝우뚝 솟아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한 숲은 탄성을 자아낸다. 이 숲은 자연이 아닌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조림이다. 특히 고 임종국 선생은 20년 동안 축령산 자락에 나무를 심어 569ha(170여만 평)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인공조림 성공지로 만들었다. 재정난으로 소유권이 여기저기로 넘어가면서 벌목 계획이 세워지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중앙에 이엉을 올린 초가집들이 서너 채 있어 영화마을 풍광을 제대로 연출했었는데 이제 초가집은 사라지고 없어 옛 풍경을 찾아 볼 수 없어 아쉽다는 목소리가 많다.

이에 대해 황 이장은 “초가집이 마을의 볼거리이자 관광 수입원이긴 하지만 정작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초가지붕의 이엉을 해마다 올리고 수리하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모를 것”이라며 “그렇다고 관리비용을 군이나 정부에서 지원 해주는 것도 아니니 안타깝다”고도 했다.

마을주민 김수선(80)씨가 연자방아 앞에서 돌리는 방법을 시연하고 있다.
마을주민 김수선(80)씨가 연자방아 앞에서 돌리는 방법을 시연하고 있다.

축령산 주변 도는 셔틀버스 어떨까?

황 이장은 영화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더욱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편의를 도모하는 차원에서라도 축령산 관광벨트를 잇는 셔틀버스를 신설해 운영하면 더욱 많은 관람객들이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며 테마기획을 통한 체험관광을 취재진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금곡마을은 정확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지만 조선시대부터 이곳에서 한지를 생산해 지소가 있는 뜸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60년대까지 지소가 그 명맥을 유지하다 양지와 벽지 등에 밀려 점차 쇠퇴했다. 당시에만 해도 마을 전체에서 산전으로 닥나무를 재배했으며 창호지와 장판 등을 만들어 지게에 지고 황룡장에 내다팔았다고 한다. 당시엔 고창이나 장성에서 급전이 필요하면 이 동네로 돈을 빌리러 왔을 정도로 부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한 그루도 남아있지 않다.

금곡마을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 고랑을 비단으로 덮을 방법이 없는가 생각하던 중 이름을 錦谷이라 하면 골짜기를 비단으로 덮는 것과 같다고 하여 금곡이라 했다는 설과 종이를 생산해 돈을 많이 벌어 종이를 비단으로 생각하고 錦谷이라 했다는 설도 있고 명당이 많은 좋은 마을이라 하여 錦谷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과거에 ‘검은골’로 불렀던 것으로 보아 ‘검은골’이 변형돼 ‘금곡’으로 변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마을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뉜다.

마을 뒷산의 옥녀봉은 옥녀가 머리를 빗는 형상과 닮았다 하고, 북쪽산이 장군대좌형으로 투구봉, 장군봉, 지마생, 책상봉 등의 명당이 있어 장군과 학자 등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고 자손이 번성할 터라고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금곡마을은 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6·25때 국방군은 이 마을을 수복한 뒤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25명의 젊은이들이 사살당하는 비극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언덕에서 내려다 본 마을전경. 마을 뒤 병풍처럼 펼쳐진 편백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언덕에서 내려다 본 마을전경. 마을 뒤 병풍처럼 펼쳐진 편백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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