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태욱 삼계농협조합장이 별세했다.
아침이슬 작사, 작곡가로 유명한 김민기 씨도 유명을 달리한 지 얼마되지 않는다.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주변의 지인들이나 가족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거나 슬퍼한다. 죽음 앞에 숙연해진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닥칠 일임을 직감하기 때문이리라.
개관사정(蓋棺事定)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관 뚜껑을 덮고 일을 정한다는 뜻이다. 죽고 난 뒤에 올바르고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아마도 소위 잘나가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이뤄진다는 행간이 숨어있다.
세속적인 권세나 막대한 부를 누리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자연히 사후에 터져 나온다. 인지상정이다.
서슬퍼런 권세나 막대한 자본력에 눌려 생전에 말을 내뱉을 수도 없는데다 혀를 함부로 놀렸다간 치도곤을 당하는 것은 뻔한 일 일테니 말이다.
94세로 눈을 감은 중국의 철학자 펑유란은 “삶은 누구에게나 치열하다. 다들 나름대로 의미있는 생을 영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한다.
펑유란은 ‘철학과 철학사에 대한 의견’에서 “사람은 태어나면서 욕구가 있고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정리했다.
공감이 되는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인생은 녹록지 않다. 불교에서는 나고, 죽고, 병들고, 늙어가는 것을 네 가지 고통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한 때 웰 다잉이 인기를 끌었다.
품위있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내용의 프로그램이다.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웰 다잉이냐”라고 콧방귀 뀌는 이가 많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분위기는 생각보다 짙고 넓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말로 그 공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런 붐에 힘입어 연명의료결정법이 지난 2018년에 제정됐다. 목적은 호스피스·완화의료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와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 및 그 이행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결정을 존중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이다.
연명의료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등 의학적 시술로서 치료효과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을 말한다. 말기환자들은 의료기관에서 담당 의사에게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요청할 수 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연명치료 중단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최근까지 2백만 명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매년 30만 명이상이 연명치료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65세 이상 인구중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비율은 13% 정도로 나타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의 사람이 자신의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사를 직접 문서로 작성한다.
의향서 등록기관은 지역보건의료기관, 의료기관, 공공기관, 노인복지관 등이다.
당하는 죽음에서 받아들이는 죽음으로의 인식 변화가 점차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법 제15조에는 연명의료중단 결정이행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경우로 한정됐다. 상속등을 둘러싼 악용의 소지를 사전에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남들의 눈에 하찮아 보이든 안보이든, 치열하게 살았건 안살았건 삶은 희노애락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 감정들은 수많은 인간관계속에서 자라난다. 특히 친밀한 가족, 부모, 형제 들에 대한 속내는 그 깊이가 남다르다. 밤 중에 울리는 전화벨소리가 그렇게 전율스러운 것은 비보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일 것이다.
이러한 번뇌에 애끓지 않기 위해 종교의 역할은 크다. 그러나 결국 스스로의 위안에 그칠 뿐이다. 무신론자가 힘든 이유는 그러한 위안을 찾기가 쉽지 않는데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죽음으로써 모든 관계에서, 모든 감정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죽음이 득도의 한 방편이 되든, 주님의 뜻에 의한 것이든 간에 수많은 걱정거리와 소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 한가지 생각만으로도 생사를 달리하는 것이 그리 두렵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매일 매순간 생명들이 탄생하고 숨 거두는 일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지적은 힘이 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