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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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08.1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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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우연히 사찰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백양사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홈페이지 첫 화면에 한눈에 확 들어오는, 정말 솔깃한 광고 카피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2018년도 하반기 출가 안내’
“내 인생에 가장 빛나는 선택 출가”
이 두 줄의 내용 뒤에는 자세한 출가 안내 설명도 곁들여있었다. ‘대자유인의 삶을 꿈꾸는 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 그러나 만 50세 이하만 가능하다는 것 등이었다.
왜 이러한 내용에 나 자신이 동하였을까?
가장 큰 이유는 ‘출가’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심장함이었다. 범인이라면 함부로 꿈꾸기 어려운 ‘출가’의 관문을 이렇게 턱 하니 열어놓고 지원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생경하고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흔히 개인 블로그나 기업체 홈페이지라면 그런 모집 광고나 홍보 문구가 이해가 가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인 불교, 그것도 가장 많은 신도들이 찾는 조계종단에서 그런 광고를 올려놓고 고객을 기다린다는 것이 너무나 낯설었다.
어느 신문 칼럼에서 승려 지원자가 급감해서 사찰 운영이 힘들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런 실상을 말해주는 것일까?
더 탐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리저리 뒤적이다 출가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글을 보고 가슴 뭉클함을 진정해야 했다.
“어서 오라, 그대여! 아주 잘 왔다”
출가는 낡은 생각과 묵은 습관에 길들여진 집 밖으로 나와 청정, 자유, 창조의 새 삶을 가꾸는 위대한 포기이고 크나큰 삶의 혁명입니다. 출가는 가슴 벅찬 환희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 걸어가는 ‘옛 길이요, 미래의 길’입니다. 출가의 길은 다른 길이면서 나만의 길입니다. 그리하여 그이 삶 하나하나가 그대로 자유와 기쁨이 되는 삶을 누립니다. 내려놓고 바라보면 길이 보입니다. 그 길은 자유의 길이요 평화의 길입니다. 삶의 큰 전환은 결단입니다.
선사의 큰 가르침으로 들려오는 가슴 저린 말씀이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주문과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싶어졌던 것일까?
학창 시절부터 치열한 경쟁 사회의 주역으로 ‘내 인생’이라는 열차에 운전수로 동승하여 질주해 왔지만 과연 옳게 운전하고 왔는지 긴 호흡으로 뒤돌아볼 시간도 없었던 나를 탓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행여 너무 나만의 방식대로 운전하며 남의 사정을 돌봐줄 겨를도 없이 살아온 것 아닐까? 혹은 나의 가족, 나의 지인들에게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멀리하고 도피적 삶을 살아오지 않았을까?    
수많은 반성과 회한들이 줄지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무래도 사색의 시공간이 필요한 순간이다. 내려놓을 시간이 있어야 한다. 벗어놓을 공간이 필요하다. 자유로 가는 탈출구가 필요하다. 그런 도피처가 내 마음의 출가였다. 출가라는 단어 앞에 ‘잠시 멈춤’을 했던 나에게 사유의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위대한 선사들의 말에 따르면 대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행선지가 출가였지만 나에겐 반성의 순간을 위한 도피처가 출가였다.
사실 중생들에게 출가는 먼 나라 이야기다. 보통의 인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맺게 되는 모든 인연과의 단절을 어찌 쉽게 내칠 수 있으랴.
모든 것을 포기해야 만이 그 반대급부로 더 큰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출가일진대 그 포기란 것이 어찌 쉬울 수 있으랴.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릿속의 출가에 그칠 수밖에 없다.
비슷한 사연을 담고 있는 방송으로 ‘나는 자연인이다’란 프로그램이 있다. 50대와 60대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방송 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연인 프로그램의 장소는 대부분 사람이 없는 산속이지만 무인도 같은 섬도 있다. 이런 곳을 찾는 사람들은 원대한 야망을 위해 온 사람들이 아니다. 상구보리나 화화중생의 길을 걷는 사람도 아니다.
그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자유’ 때문이었다. 속세의 여차 저차 한 인연으로부터 자유로움이요, 순수한 자연 속에서의 자유로움이 그 목적이었다.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작은 자유였다. 큰 스님들은 출가를 통한 구도자의 길에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만 범인들은 그런 작은 우주 안에서의 자유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는다.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단 하루만이라도 더 살기를 간절히 원했던 바로 ‘그 날’이라고 한다. 작은 ‘그 날’들이 반복되면 인생이 된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곱씹어본다.   /백형모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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