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이 뭣고’ 외침의 의미는…
백양사 ‘이 뭣고’ 외침의 의미는…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08.21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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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장 세간을 향한 외침 '이 뭣고'
"이 순간에 살뿐, 미래 욕심에 마음을 두지 말라"
백양사 경내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이 뭣고’ 탑비는 어지러운 세상을 향한 죽비처럼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사진 오른 쪽은 명부전에서 바라보는 백양사 대웅전과 운문암 올라가는 표지판.
백양사 경내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이 뭣고’ 탑비는 어지러운 세상을 향한 죽비처럼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사진 오른 쪽은 명부전에서 바라보는 백양사 대웅전과 운문암 올라가는 표지판.

아수라장 세간을 향한 외침 '이 뭣고'

불교계가 아수라장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설정 스님에 대한 총무원장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됐다.
조계종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다. 
총무원장이란 자리는 한국 사찰의 대부격으로 사찰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 지휘하는 위치에 있는 최고 기관장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생활 문제와 재산 문제로 탄핵을 당할 위치에 처했다.
가장 도덕적이어야 할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스님들의 도량인 절간이다. 그런데 이 절간이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총무원장을 두고 한쪽에선 보호하려 하고, 한쪽에선 내치려고 하고 있다. 한쪽에선 ‘불교계가 이래선 안된다. 과감히 개혁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한쪽에선 ‘설정 스님에게 돌 던질 자격 있는 스님 나와보라’고 말하고 있다. 같은 날, 탄핵을 촉구하기 위한 한쪽에선 승려대회가 열리고 한쪽에선 맞불 집회가 열린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변과 얽히고 설킨 일들이 어우러진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다. 마치 자기들이 만든 도량에서, 자기들의 행동을 두고 서로 옳고 그름을 탓하며 총질하는 격이다. 흔히 말하는 ‘네 탓 내 탓’ 논쟁이다. 보통 사람 사는 세상보다 더한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아비지옥을 연상케 하고 있다.
어디나 절간에 들어서면 이런 아비규환의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눈을 부릅뜬 사천왕상이 있다. 이런 세간을 보고 그분이 철퇴를 들고 나타나 외칠 것만 같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고~”

"이 순간에 살뿐, 미래 욕심에 마음을 두지 말라"

만암 대종사의 얼을 간직한 백양사 탑비

백양사 경내에 들어서 극락교를 지나면 사천왕문 옆에 우뚝 선 탑비가 나타난다. 이곳에 들러본 불자들은 그 의미에 대해 한번쯤은 곰곰이 더듬어 봤을 법하다.
‘이 뭣고’
탑비의 아래 새겨진 글씨를 따라 ‘이 뭣고’ 탑이라 이름한다.
탑비의 위쪽에는 ‘만암 대종사 고불총림 도량’이라고 새겨져있다. 근대 불교계의 거목이신 만암 스님의 발자취를 담은 수도량이란 점을 밝히고 있는 탑비이다.
그런데 ‘이 뭣고’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교적 설명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선(禪)을 참구(參究)하는데 그 의제로 삼는 것을 화두(話頭)라 한다. 이 화두는 일천칠백 가지가 있다. 그 중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시심마(父母未生前 本來面目 是甚磨)라는 것이 있는데 바로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나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의제를 의심하기 위해 ‘이 뭣고’하며 골똘히 참구하면 본래 면목인 참 나(眞我)를 깨달아 생사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쉽게 풀이한다면 존재의 원초적 의문을 화두로 삼고 근원에 대해 끝없는 성찰을 더해나간다면 참 나를 깨닫게 되리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만암 대종사께서는 오늘처럼 혼탁해질 세상을 염두에 두고 ‘이 뭣고’를 끊임없이 반복하도록 하에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도록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뭣고’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속단키 어렵지만 모든 화근으로부터 해탈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다른 몸짓이 아닐까. 너무나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그곳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만큼 끊임없이 번뇌하고 또 번뇌하라는 가르침 아닐까.
이 물음에 대해 세계적인 명상의 대가인 틱낫한은 이렇게 가르친다.
“행복은 그대가 자유로울 때만 찾아온다. 왜 그대는 행복에 대한 생각에 얽매여 있는가. 왜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가. 꼭 행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다면 그대는 사방에서 찾아오는 행복을 맞아하게 될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버리지 못하고 얽매인 것에 모든 화근을 두고 있다. 그 본질은 미래의 욕심을 사로잡고 있는 마음이다. 과거와 미래로부터 벗어남이 필요하다. 우리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살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멋지게 살려면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좋은 집과 자동차를 사야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밖에 살지 못한다. 언제일지 모를 먼 미래로, 끝없이 미래로 삶을 미룬다. 하지만 ‘삶의 기술’이란 다름 아닌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간은 오직 지금 이 순간 뿐이다. 이 순간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평화, 얼굴에 미소가 느껴질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말씀을 남기신 분이 바로 법상 스님이다. 법상 스님은 모든 악행과 덕행의 근원을 ‘마음’이라고 봤다.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를 좋아한다. 내 마음에 가만히 붙어있어야 하는데 자꾸 바깥으로 놀아나길 좋아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붙었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붙었다가, 돈에 가 붙고, 명예에, 권력에, 지위에 가서 붙고, 직장인은 진급에 가 붙고, 욕을 얻어 먹으면 욕한 사람에게 가 붙고, 칭찬을 들으면 칭찬한 사람에게 옮겨가고, 지나간 과거에도 붙고, 오지 않는 미래에도 가 붙기도 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마음이란 놈의 특성이 붙잡기를 좋아하다보니 이 놈이 밖으로 외출만 하고 돌아오면 혼자 오지를 않고 온갖 번뇌며 애욕이며 집착거리를 잔뜩 짊어지고 돌아온다. 그러니 마음이 늘 무겁게 된다. 늘 혼란스럽고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 이 마음이 내 안에 중심을 잡고 턱 하니 버티고 있어서 몸 있는 곳에 마음도 있어야 한다.
혼탁해진 세상을 위해 선인들이 남긴 말씀을 새겨보자.
“이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나
단지 사용하다 버리고 갈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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