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전 주련에 담긴 뜻은?
대웅전 주련에 담긴 뜻은?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08.29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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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정확한 위치는 어딥니까”
“네가 꿈꾸는 백일몽의 정중앙이니라”
백양사 대웅전의 주련산사에는 주련(柱聯)들이 붙여져 있다. 기둥(柱) 마다에 시구를 연(聯)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 부른다. 백양사 대웅전의 주련을 보자.佛身普遍諸大海(불신보변제대해) 充滿法界無窮盡(충만법계무궁진) 寂滅無性不可取(적멸무성불가취) 爲救世間而出現(위구세간이출현). 굳이 해석하자면 ‘부처님 몸 너른 세상에 나타내시니, 온 법계에 충만하여 다함이 없어라, 고요하고 무궁한 지혜 취할 수도 없지만, 세간 중생 건지시려 출현하셨네’라고 할 수 있겠다. 절을 찾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충만함을 알리기 위한 글귀다.
백양사 대웅전의 주련산사에는 주련(柱聯)들이 붙여져 있다. 기둥(柱) 마다에 시구를 연(聯)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 부른다. 백양사 대웅전의 주련을 보자.佛身普遍諸大海(불신보변제대해) 充滿法界無窮盡(충만법계무궁진) 寂滅無性不可取(적멸무성불가취) 爲救世間而出現(위구세간이출현). 굳이 해석하자면 ‘부처님 몸 너른 세상에 나타내시니, 온 법계에 충만하여 다함이 없어라, 고요하고 무궁한 지혜 취할 수도 없지만, 세간 중생 건지시려 출현하셨네’라고 할 수 있겠다. 절을 찾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충만함을 알리기 위한 글귀다.

“지옥의 정확한 위치는 어딥니까”
“네가 꿈꾸는 백일몽의 정중앙이니라”

계절이 바뀌고 있다.

그 요란스럽던 여름이 바람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누가 가라 해서도 아닐진대...

누가 오라 손짓해서도 아닐진대...

그냥 그대로 있을 줄 모르고 낙엽 하나 떨구고 달려간다.

대지에 흩어지는 잎 새 하나는 바로 우주로 통한다.

흐름이란 무엇인가.

가고 옴이란 무엇인가.

이 사이에서 인류의 성자들이 그렇게 추구해온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맞을 수 있는가.

우리나라 명산대찰마다 부처님이 계시고 선방이 있다. 도심 곳곳의 교회엔 예수님이 계시고 성당에 성모마리아님이 계신다. 그곳들 마다 복을 주문하고 평안함을 기원한다.

대부분 기도의 끝은 ‘나를 거두어 주소서’이다.

대관절 무엇을 거두어 달라는 것인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에서도 내 맘대로 모두 이루어진다면 나 아닌 당신이 그만큼 손해보고, 당신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내가 고스란히 손해 보는 게 세상 이치다.

그런데도 끝까지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를 기원하고 싶은가.

제발 놓아두어라.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건 저들 마음이고 철따라 꽃이 피고 지는 것도 꽃님들 마음이다.

예수님도 가라사대 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대지를 크나큰 유산으로 물려받는다 했다. 지당한 말씀처럼 예수님은 살아생전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했으니 하늘 뜻과 일치된 그 마음의 대지를 얻은 셈이다.

세존께서도 이와 통하는 말씀을 남겼다.

진실로 하늘 뜻을 따르는 자는 불 속에 핀 연꽃으로 길이 시들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집념과 집착에서 온다.

성자께서 말씀하셨다.

부귀를 구하니 가난이 싹트고

천사를 청하니 악마가 날뛰고

더 이상 구하지 않으니 천당이 솟아나더라.

『인생이란 무엇인가.

자유를 희구하는 존재다.

하늘 같은 자유, 죽음 같은 자유, 자유는 무한의 텅 빔이다.

다시금 텅 빔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질문하고 대답하는 양극의 고민이 아니라 그대 자신인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

백양사 진입로의 아스팔트길과 걷는 길인간의 선택엔 항상 두 갈래 길이 있다. 쉽고 편한 길과 그렇지 않는 길이다. 하지만 궁극의 목적지는 같다. 그 끝엔 존재의 영원함 뿐이다. 나의 편안함이 남의 불편함을 전제로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지 가릴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부처가 가는 길 아닐까. 백양사 경내로 들어서는 길에는 나란히 두 길이 있다. 싸목싸목 걸을 수 있는 길과 휑하니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아스팔트길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자유이지만 도착지는 절간이다.
백양사 진입로의 아스팔트길과 걷는 길인간의 선택엔 항상 두 갈래 길이 있다. 쉽고 편한 길과 그렇지 않는 길이다. 하지만 궁극의 목적지는 같다. 그 끝엔 존재의 영원함 뿐이다. 나의 편안함이 남의 불편함을 전제로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지 가릴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부처가 가는 길 아닐까. 백양사 경내로 들어서는 길에는 나란히 두 길이 있다. 싸목싸목 걸을 수 있는 길과 휑하니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아스팔트길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자유이지만 도착지는 절간이다.

 

“인생은 자유를 희구하는 존재···
하지만 그 자유는 무한의 텅 빔이다”

힌두교 경전의 한 구절에 인생사의 제반 의문에 대한 답으로 이런 몇 줄이 서술되고 있다.

『천당에 가려면요?

고요한 마음이 관건이요.

이 세상에 끔찍한 일들은 왜 일어나는가?

주변의 온갖 동식물들이 죽어감을 목격하면서도 나 자신만은 천년만년 고고히 살고 지고 할 것이라는 어리석음 때문이요.

어떻게 하면 마음을 고요히 다스릴 수 있습니까.

안팎으로 모든 것을 닫아걸고 옴 사트 다트를 외우십시오』

여기에서 옴(唵)이란 산스크리트 옴(om)의 음역이다. 우주의 진동을 응축한 태초의 소리로서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자세를 일컬음이다.

이 진리를 불법에서는 간단히 설명한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한 번 죽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인간이 아무리 심오하게 발버둥 쳐 봤자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는 자연 법계가 고작이다. 그 속에서 함께 어울려 물 따라 바람 따라가는 것 말고 무엇을 일러 진리라 하며 달리 무엇을 일러 진리가 아니라고 도리질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비움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생사는 당신이 당신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는 집착심에서 비롯된다. ‘육체가 나’라는 아상을 지워보라. 자연스레 생사가 달라붙을 여백이 없어질 것이다.

삶이 꿈이라면 꿈꾸는 자 역시 꿈이고, 술이 환상이라면 술 취하는 자 역시 환상이다.

그러나 그 잘난 아상(我相)을 깨부숴야 한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여인을 비유해서 설명한다.

모든 여성들의 공통된 소망은 과부가 되지 않는 것이다. 간절한 것 같지만 쉬운 일이다. 그 방법은 남편보다 먼저 죽으면 간단하다.

아상을 지우기도 그만큼 쉽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만 지우면 된다.

그러면 덤으로 오욕락(성욕, 식욕, 물욕, 명예욕, 무사안일욕)이 제풀에 지쳐 꺾일 것이다.

이 쉬운 것을 왜들 못하는가?

스스로의 에고에 사로잡혀 있어서다.

진실로 그대 인생을 하느님이 빚은 명품으로 찬란케 하려면 먼저 자신부터 비워라.

하고 많은 좋은 곳 중에 천당은 어디에 있는가.

천당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어떤 꼴인가.

“성불합시다”

우르르 떼 지어 절에 가고,

“찬양합시다”

우르르 떼 지어 예배당에 가고,

“애국합시다”

우르르 떼 지어 길거리에 모이는 것이 우리들 아닌가.

이건 사바세계의 실체다.

그래서 또 한 번 묻는다.

“그렇다면 지옥의 정확한 위치는 어딥니까”

“네가 꿈꾸는 백일몽의 정중앙이니라”

우리 같은 가엾은 중생들로선 더 이상 들을 말이 없다. 되새기는 일밖에...

다시 한마디만 더 예를 들어본다.

명상의 나라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거지들의 마음자세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가난함에 그대는 나대신 부자가 되었고, 내가 병들었음에 그대는 나대신 건강한 것이니 두고두고 내 은혜를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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