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에 이르는 길
열반에 이르는 길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09.18 1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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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은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이고
분노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저항이며
어리석음은 분노의 발생과 소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디로 가시나이까?” 비구가 붓다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이란 어떤 자를 말합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몸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자를 중생이라 하고, 느낌, 생각, 의기, 인식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자를 중생이라 한다. -백양사 경내 진입로
“어디로 가시나이까?” 비구가 붓다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중생이란 어떤 자를 말합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몸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자를 중생이라 하고, 느낌, 생각, 의기, 인식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자를 중생이라 한다. -백양사 경내 진입로

열반에 이르는 길에 장애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를 3독(毒)이라 하는데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말한다.

탐욕은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이고 매사가 자신의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는 망상이고, 남이 자신을 인정해 주길 바라는 갈구이다.

분노의 바탕은 저항이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데서 일어나는 저항이고, 허망한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데서 일어나는 저항이다. 싫다고 저항하는 게 분노이다.

어리석음은 자신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매사에 얼마나 성을 잘 내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그 탐욕과 분노의 발생과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다.

붓다께서 죽림정사에 있을 때 한 바라문이 몹시 화가 나서 그를 찾아왔다. 그의 친구가 붓다에게 출가했다는 이유였다. 붓다는 그가 심하게 욕하는 것을 묵묵히 듣고 잠잠해지자 말씀하셨다.

“바라문아, 그대는 집에 손님이 오면 좋은 음식을 대접할 것이다.”

“그렇다”

“바라문아, 만약 그때 손님이 음식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것은 당연히 내 것일 수밖에 없다”

“바라문아, 그대는 내 앞에서 온갖 악한 말을 했지만 나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러니 그대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바라문아 만약 내가 그 욕설을 되받아 욕한다면 그것은 주인과 손님이 함께 식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

모든 현상은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일어나는 생멸을 끝없이 반복한다. 이 생멸이란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없어지는데 이 무상에 저항하고 집착하면 괴로움에 갇히게 된다.

생물은 무상하기 때문에 죽지만 또 무상하기 때문에 태어난다. 이 무상에 저항하는 건 그야말로 소용없는 저항이다. 그래서 무상을 절감하고 거기에 자신을 내맡겨야 저항과 집착이 희박해져 평온에 이르게 된다.

“세존이시여, 자주 무상(無常) 무상하시는데 도대체 무엇을 무상이라 하십니까?”

“비구들아, 우리 몸은 변하는 것이다. 우리의 느낌도 변한다. 우리 생각도 변한다. 우리 의지도 변한다. 우리 인식도 변한다.

비구들아, 이를 잘 관찰해서 일체를 떠나라, 일체를 떠나면 탐욕이 없어지고, 탐욕이 없어지면 해탈할 수 있다. 해탈한 그때 미혹된 삶은 끝난다.

비구들아, 무상한 몸, 느낌, 생각, 의지, 인식을 무상하다고 볼 때 비로소 올바른 앎을 얻는다”

불교에서는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을 통틀어 카르마(karma)라고 한다. 굳이 해석한다면 업(業) 또는 업보(業報)라고 한다.

중생이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총칭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현세에 인과응보를 받는 실타래가 되는 것이다. 몸으로 짓는 업보는 깨달은 존재인 붓다와 윤회하는 존재인 중생의 차이를 가른다. 즉 중생들의 윤회하는 영역을 가리킴이요, 인간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차이가 생기는 이유를 불교식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인간의 업보, 즉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중립이며 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것인데 각각이 선과 악, 즐거움과 고통의 열매를 맺는다. 선한 행위와 선하지 못한 행위는 과보를 낳지만 선악미정인[無記] 행위는 과보를 동반하지 않는다. 즉 선한 행위는 좋아하는 과보[愛報]를 낳고, 선하지 못한 행위는 싫어하는 과보[不愛報]를 낳는다는, 행위와 그 결과의 대응 법칙이다.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대로 고락의 과보를 받는데 그 과보는 전생에서 현생으로, 그리고 내세로 연결된다고 사유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각과 욕망을 통제함으로 자유로움을 얻어 업과 윤회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업보는 각각이 선과 악, 즐거움과 고통의 열매를 맺는다. 선한 행위와 선하지 못한 행위는 과보를 낳지만 선악미정인[無記] 행위는 과보를 동반하지 않는다. 선한 행위는 좋아하는 과보[愛報]를 낳고, 선하지 못한 행위는 싫어하는 과보[不愛報]를 낳는다는, 행위와 그 결과의 대응 법칙이다.

“붓다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고의로 업을 짓는다면 현세에 그 과보를 받을 수도 있고 후세에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위로 지은 업이 아니라면 과보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업에는 몸으로 짓는(身業) 세 가지가 있고 입으로 짓는(口業) 네 가지가 있고 뜻으로 짓는(意業) 세 가지가 있다. 이것들은 다 선하지 않아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

무엇이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인가? 하나는 산목숨을 죽이는 것이요, 둘은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것이요, 셋은 음란한 짓을 하는 것이다.

무엇이 입으로 짓는 네 가지인가? 하나는 거짓말하는 것이요, 둘은 이간질하는 것이요, 셋은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을 하는 것이요, 넷은 교묘하게 꾸민 말을 하는 것이다.

무엇이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인가? 하나는 탐욕을 부리는 것이요, 둘은 시기하고 성내는 것이요, 셋은 그릇된 견해다.

배운 게 많은 거룩한 제자는 몸으로 짓는 선하지 않은 업을 버리고 몸으로 선한 업을 닦고, 입과 뜻으로 짓는 선하지 않은 업을 버리고 입과 뜻으로 선한 업을 닦는다”

업의 본성에 관하여는 화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존재의 본성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과보를 받는 것은 업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 업이라는 것도 실체는 없다.

마치 맑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여러 가지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종자와 밭이 서로 모르지만 싹이 트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지옥의 고통이 따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이와 같이 업은 실체가 없지만 일상을 통하여 선악의 업을 쌓으면 그것이 업인(業因)이 되어 업과를 받는다. 다만 선도 악도 아닌 무기업(無起業)은 과보를 이끄는 힘이 없다.

붓다께서는 세상을 무상(無常)과 고(苦)의 바다로 보았다. 그 고는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의 세 가지로 분류했다. 고고는 통증, 갈증 등과 같이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괴로움이고, 행고는 불안하고 안정되지 않은 마음 상태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이고, 괴고는 애착하는 대상이 파괴되어 감으로써 받는 괴로움이다.

중생의 마음은 모든 현상을 좋다/싫다, 즐겁다/괴롭다, 아름답다/추하다, 편하다/불편하다의 이분법으로 구분하고 한쪽은 회피하며 다른 한쪽에 집착하면서 마치 시계추처럼 끊임없이 왕복한다.

회피와 집착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 왕복운동의 진폭도 커져 더 큰 불안정에 휘둘린다. 그래서 늘 불안정하고 얽매이고 유혹에 흔들린다.

“비구들아, 저 강물의 물결을 보라. 살펴보면 거기에는 실체도 없고 본질도 없다.

비구들아, 어떻게 물결에 실체와 본질이 있겠는가.

몸은 물결,

느낌은 거품,

생각은 아지랑이,

의지는 파초,

인식은 허깨비.

이것이 세존의 가르침이다”

“모든 것들이 타고 있다”“비구들아, 모든 것이 활활 타고 있다. 그대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아, 눈이 타고 있다. 귀도 타고 있다. 마음도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향해 타고 있다. 탐욕의 불꽃으로 타고, 분노의 불꽃으로 타고, 어리석음의 불꽃으로 타고 있다. -백양사 사천왕상
“모든 것들이 타고 있다”“비구들아, 모든 것이 활활 타고 있다. 그대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아, 눈이 타고 있다. 귀도 타고 있다. 마음도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향해 타고 있다. 탐욕의 불꽃으로 타고, 분노의 불꽃으로 타고, 어리석음의 불꽃으로 타고 있다. -백양사 사천왕상

알기 쉬운 불교 상식

<불공과 재 (齋)>

불공은 불보살에게 음식과 꽃 향 등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치거나 바치면서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의식이다. 불공은 살아있는 사람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는 것이고, 재는 묵은 이의 넋을 위로하는 의식이다.

대표적인 49재는 묵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7일마다 7회에 걸쳐 행하는 의식으로 칠칠재라고도 한다. 불교의 내세관에서는 사람이 죽어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49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하여 구천에 떠돌고 있다가, 49일 째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다고 믿고 장엄하게 예를 행한다.

<천도재와 수륙재>

천도재(薦度齋)는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독경과 시식, 불공 등을 베푸는 예식을 말한다. 수륙재(水陸齋)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을 구제하기 위하여 불법을 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행위다. 수륙재는 예술성이 가미되는데 잘 다듬어진 의식문을 범패라는 불교 음악으로 읊는데 반주는 목탁, 목어.북.종.운판.요령 등으로 한다. 또 의식의 중요한 부분에서는 불교 무용을 곁들이기도 한다.

<방생회>

사람에게 잡혀 죽게 된 물고기나 동물을 놓아주는 의식이다. 방생은 ‘살생하지 마라’라는 계율을 바탕으로 자비를 실천하여 생명의 존엄성을 깨우쳐주는 가르침이다. 불자들은 죽을 운명에 처한 그들이 불보살의 가호를 받아 인간으로 태어나 불제자가 되기를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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