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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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청 기자
  • 승인 2018.03.1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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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의 시작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지금 대한민국은 ‘미투’운동이 대세다. 뉴스나 회의석상이나 밥상머리에나 온통 ‘미투’가 빠지면 말이 안되는 풍조가 됐다. 오늘은 또 어디에서 새로운 ‘미투’가 터지나, 누가 자살하지나 않나, 앞으로는 어느 직종으로 번지나 하는 등등의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는 ‘미투’가 없었을까?

가까이 기억할 수 있는 근대사 언저리에서 찾아보자.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은 상상할 수 없는 철권 통치처럼 느껴지는 일제 식민지 지배에서 중고등학생들이 감히 저항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발단은 극히 작은 여학생 희롱사건으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그 시절, 중등교육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었다. 공부도 잘해야 하지만 집안이 어느 정도 재력도 있어야 했다. 그 시절 이 땅의 대다수 청소년은 중등교육을 받아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고보(지금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고등보통학교의 줄임말)에 진학한다는 것은 요즘 말로하면 외국 유학을 가는 수준과 같았다.

하지만 이같은 고등교육을 받으면서도 식민지배를 받는 처지에서 민족성을 되찾기 위해 고민하고,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이 문제를 토론하곤 했다.

광주에는 여러 학교 학생들이 성진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해 민족적 차별을 낳는 제국주의의 모순에 대해 깊이 있는 이론적 공부도 하고 동맹 휴학을 일으키는 등 저항의 강도를 높여 가고 있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바로 그러한 고민과 저항, 그리고 분노가 쌓이고 쌓인 결과였다.

열차에서 여학생 댕기 잡아당겨 패싸움

사건의 발단은 그해 10월 30일에 있었던 한국인 고보생과 일본인 중학생 간의 충돌이었다. 당시에는 전남 나주에서 열차를 타고 광주에 있는 중학교나 고보에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날 광주중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 후쿠다 슈조가 광주여자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기옥을 비롯한 한국인 여학생들의 댕기꼬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했다.

열차에서 내려 나주역 개찰구를 나오던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광주고보 2학년)는 분을 참지 못하고 후쿠다 슈조와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은 나주역전에서 광주고보생들과 광주중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대되었다. 사태를 진압하러 달려온 일본인 순경들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 편을 들고 박준채를 구타했다. 다음 날 이 사건을 보도한 일본인 신문 <광주일보>도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 편을 들면서 한국인 학생들을 폭도로 매도했다.

광주고보생을 비롯한 광주의 한국인 학생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해 11월 3일은 일본 메이지 천황의 생일인 명치절(明治節)로 일제의 4대 명절 가운데 하나였다. 공교롭게도 음력으로는 10월 3일이라서 한국인에게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한 개천절이었다. 또한, 광주 지역 학생들의 비밀 결사인 성진회의 창립 3주년이기도 했다.

광주고보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이 끝나자마자 나주역 사건을 악의적으로 보도한 <광주일보사>로 몰려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또 다른 광주고보생들은 신사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광주중학생들과 광주천에서 맞닥뜨려 광주역까지 추격전을 벌였다. 일본인 학생들이 얻어맞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광주중학생 수백 명이 목검을 들고 광주역으로 밀어닥치자 한국인 학생들은 광주고보생과 광주농고생이 힘을 합쳐 맞섰다. 이 싸움에서 한국인 학생 아홉 명, 일본인 학생 스물여섯 명이 부상을 당했다.

<광주일보사>를 습격한 광주고보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광주역에서 패싸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면적인 가두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약 300명의 학생이 목봉, 삽, 곡괭이 등을 들고 거리로 나서 “일본 제국주의 타도!”, “식민지 교육 철폐!” 등을 외쳤다.

‘제국주의 타도’ ‘대한독립 만세’로 이어져

이런 구호는 단순히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던 10년 전의 3.1운동 때와는 달라진 것으로, 학생들이 식민 치하의 민족 모순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때마침 광주에서는 ‘전남 누에고치 600만 석 돌파 축하회’가 열려 각지에서 많은 농민이 올라와 있었다. 광주 시민과 이들 농민이 학생들의 시위에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한때 3,000명이 넘는 규모로 불어났다.

제국의 명절에 한국인의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당황한 일제는 광주 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그리고 한국인 학생 75명과 일본인 학생 7명을 구속했다. 이들 가운데 한국인 학생 62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일본인 학생은 전원 석방되었다.

이 같은 일제 당국의 편파적 대응은 광주의 학생과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그해 11월 12일 학생들은 제2차 봉기를 일으켜 광주형무소를 포위하고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번에는 400명 가량의 학생이 구속되고 약 70명에게 체형이 선고되었다.

광주의 학생 운동은 엄격한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신간회>라는 통일전선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신간회>는 허헌, 김병로 등 유력 인사들을 광주에 내려 보내 진상을 조사하고, 독립 만세 운동을 전국에서 벌여 나가기로 했다. 그에 앞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중등 학생들은 광주 학생들에 호응해 시위와 동맹 파업을 벌여 나갔다.

1929년 연말 전국을 들끓게 한 학생독립운동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시 우리의 10대들이 얼마나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잘 알려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았다.

90년 전, 청순한 여학생을 희롱하며 비웃는 일본 학생들의 농간 태도가 전국을 들끓게 한 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작은 성희롱이 민족의 독립을 이끌어 내는 발단이 된 것이다.

지금의 ‘미투’ 운동은 어떤 사회적 영향을 미칠까?

우리사회가 작은 불균형이라도 시정하고, 약자가 당당한 대우를 받고 사는 시발점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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