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의 절대 진리 - 진제(眞諦)를 구하라
불변의 절대 진리 - 진제(眞諦)를 구하라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10.02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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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이르는 길
백양사의 범종각범종은 아침 저녁 예불을 할 때 치는 큰 종으로 그 소리를 부처님의 음성이라 했다. 부처님의 말씀을 표현하면 불경이 되고,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하면 불상이 되고, 부처의 깨달음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만다라가 된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음성을 범종의 소리라고 했다. 범종을 걸어두는 종루에는 범종 이외에 법고, 목어, 운판 등을 함께 배치하기도 한다.
백양사의 범종각범종은 아침 저녁 예불을 할 때 치는 큰 종으로 그 소리를 부처님의 음성이라 했다. 부처님의 말씀을 표현하면 불경이 되고,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하면 불상이 되고, 부처의 깨달음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만다라가 된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음성을 범종의 소리라고 했다. 범종을 걸어두는 종루에는 범종 이외에 법고, 목어, 운판 등을 함께 배치하기도 한다.

"깨끗함에 의존하지 않고는
더러움이 없고
깨끗함에 의존하여 더러움이 있나니
그러므로 더러움은 없다.
더러움에 의존하지 않고는
깨끗함이 없고
더러움에 의존하여 깨끗함이 있나니
그러므로 깨끗함은 없다."

바로 그랬다.
하나의 현상은 거기에 대립하는 현상을 전제로 하고 그 대립하는 현상이 없을 때는 하나의 현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좋다’가 없으면 ‘나쁘다’도 없고, ‘아름답다’가 없으면 ‘추하다’도 없고 ‘착하다’가 없으면 ‘악하다’도 없다. 또 ‘꽃’은 ‘꽃 아닌 것’과의 분별이고 ‘사과’는 ‘사과 아닌 것’과의 분별이다.
모든 현상은 그냥 존재하고 그냥 흘러가는데 인간이 ‘좋다/나쁘다’의 2분법으로 분별을 일으킨다. 풀은 그냥 자라고, 돌멩이는 그냥 있고, 시냇물은 그냥 흘러가는데 인간이 경계를 짓고 분별한다. 
이 2분법은 언어의 결함이 아니라 언어의 본질이다. 언어 자체가 분별이다. 그래서 현상 그 자체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것을 공(空)이라 했다.
즉 현상 그 자체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습관적인 분별에 지나지 않고, 현상 그 자체에 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분별이 끊긴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파악된 진리를 진제(眞諦)라 하고, 분별과 차별로 인식한 진리를 속제(俗諦)라 했다. 이 제(諦:살필 제)라는 말은 ‘명료하게 알다’의 뜻으로 ‘변치 않는 진리’를 일컫는다.
불교에서는 진리(dharma:다르마)를 진제와 속제로 구분하여 설하고 있다.
진제는 절대적 진리 즉 최고의 진리로서 세속적 입장을 초월한 진리, 세속을 초탈한 출세간적  세계의 진리, 궁극적 관점에서의 진리를 뜻한다. 이 진제는 반야바라밀, 공(空), 진여(眞如), 해탈(解脫), 열반(涅槃) 등 최상의 진리를 이른다. 여기에서는 일체를 부정하고 언어를 초월하며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비인비과(非因非果)인 것을 말한다.
속제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세간적 진리, 세속의 이치를 기준으로 할 때 보편타당한 진리,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통속적 진리, 현실생활에서 현상법에 따라 설명될 수 있는 진리를 뜻한다. 그래서 속제를 세속제(世俗諦), 또는 세제(世諦)라고도 불렀다.
속제는 모든 것이 인(因)과 연(緣)으로 이루어진 과(果)이고 모든 것은 생멸의 원리로 돼 있으며 신진대사의 원칙에 따르는 초보적인 이치를 말한다. 속제에는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 등이 속한다.
그래서 무상, 무아, 고는 속제에서는 진리이지만 진제에서는 진리에 속하지 못한다. 속제는 한 마디로 번외의 세계를 정의하고 진제는 번뇌를 여읜 세계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늙어 죽는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인데 이러한 현상의 이치가 바로 속제에 해당한다.
그러나 늙음도 죽음도 윤회마저도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가 바로 진제이다.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어 죽어가는 모든 과정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반야의 세상, 불생불멸의 현상이 진제이다.

대립하는 현상이 없을 때는 하나의 현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좋다’가 없으면 ‘나쁘다’도 없고,
‘아름답다’가 없으면 ‘추하다’도 없다.
그래서 둘은 같은 것이다.

장성 백양사 쌍계루의 우아한 풍경백양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제18교구본사로서 승려들의 참선을 위한 시설인 선원, 경전 교육 기관인 강원, 계율 교육 기관인 율원 등을 갖춘 큰 사찰이란 뜻의 총림(叢林)으로 불린다. 우리나라 5대 총림에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가 있다.
장성 백양사 쌍계루의 우아한 풍경백양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제18교구본사로서 승려들의 참선을 위한 시설인 선원, 경전 교육 기관인 강원, 계율 교육 기관인 율원 등을 갖춘 큰 사찰이란 뜻의 총림(叢林)으로 불린다. 우리나라 5대 총림에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가 있다.

여러 인연으로 일어나는 것을
나는 공(空)이라 하나니
이것 또한 임시로 붙인 이름이고
중도의 뜻이다.
일찍이 한 가지도
인연을 쫓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나니
그러므로 모든 현상은
공 아닌 것이 없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화합으로 일어나고 소멸한다. 어느 것도 독자적으로 존속하는 고유한 실체도 있을 수 없고 고정된 경계나 틀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공이라 했다.
모든 생명과 모든 사물들은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다. 끝없이 변한다. 따라서 생명체 역시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무아(無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이 아상(我相-자아)에 집착하고 있다.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고 이 몸뚱이에 나의 본질적인 근원을 설정하고 그러한 ‘나’에게 집착한 나머지 재산과 명예와 권력이 영원히 제 것으로 착각하여 탐욕에 빠지고 있다.
‘나’란 존재는 무상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면 불생불멸이기 때문이다. 본래 태어난 게 없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는 것이고,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自我)마저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공이라 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어 붓다, 즉 깨달은 자가 되었다. 붓다는 깨달음을 성취한 성자로서 살아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입멸 후에도 제자들과 중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가장 총명했던 아난존자가 변고를 당한 뒤 붓다를 찾아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몸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사방이 아득하고 캄캄합니다”
붓다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무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마라. 생기거나 나타난 모든 것들은 무너지는 법이다. 아무리 무너지지 않으려 해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난아, 내가 말했듯이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은 다 서로 떨어지기 마련이어서 영원히 보존될 수 없는 법이다. 큰 나무에서도 뿌리와 줄기, 가지, 잎, 꽃들이 떨어지고 부러지기 마련이다. 너는 이제 너무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마라. 아난아, 이 여래도 머지않아 가고 말 것이다”
아무리 깨달음을 얻은 붓다이지만 자신마저도 곧 가게 될 것이란 속제의 진리를 아난에게 가르치고 있다.

사천왕상의 위엄대부분의 사찰 입구에는 이같은 사천왕상이 자리하고 있다. 불법을 보호하고 우주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세간의 선악을 살피는 역할을 한다. 불거져 나온 부릅뜬 눈과 잔뜩 치켜 올린 눈썹, 크게 벌리고 있는 빨간 입 등이 두려움을 준다. 한쪽에서는 악기를 한쪽에서는 큰 칼을 들고 마귀를 처단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사천왕상의 위엄대부분의 사찰 입구에는 이같은 사천왕상이 자리하고 있다. 불법을 보호하고 우주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세간의 선악을 살피는 역할을 한다. 불거져 나온 부릅뜬 눈과 잔뜩 치켜 올린 눈썹, 크게 벌리고 있는 빨간 입 등이 두려움을 준다. 한쪽에서는 악기를 한쪽에서는 큰 칼을 들고 마귀를 처단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종교와 숭배사상의 경계는?

인간에게 우상숭배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에게 우상숭배는 인류의 역사와 나란히 존재해왔다.
원시 시대에 마을 입구의 큰 나무나 선돌을 보호자로 여겨 숭배하기 시작한 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숭배의 역사는 인류의 지배문화와 괘를 같이해 왔다. 한국은 곰을 토템신앙으로 모신것처럼 각각의 민족과 국가가 신앙을 갖거나 숭배 대상을 모셔왔다.
때로는 그러한 믿음 때문에 어느 종교가 서로의 우상을 극단적으로 배척하기도 하고, 또 자신도 우상 숭배를 금하기도 하다.
기독교에서는 우상숭배를 10계명으로 못 박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애굽기 20:4>’
기독교는 이같은 가르침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우상도 배격하고 있다. 개신교는 상을 만들지는 않으나 상징물인 십자가는 허용하고 있다. 반면 천주교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상을 만드는 것은 허용하고 있다.
우상숭배를 가장 격렬히 배격하는 이슬람교는 일체의 상징물을 만들지 않으며 십자가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마저 도리어 우상숭배자라고 비난한다.
우리나라 절에는 유난히 많은 불상이 있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여러 불상들을 모신다. 석가모니불 이전에도 여섯 부처가 있었는데 석가모니불을 합해 과거7불이라 한다. 또 도솔천에서 수행 중인 미륵보살은 먼 미래에 이 세상에 내려와 미륵불이 된다는 미래불이다. 
모든 종교는 인류가 만들고 가꾸어온 숭배 문화의 한 부류라고 보는 것이 현명하다. 타 종교를 인정하는 것도 종교가 가르치는 넓은 아량의 하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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