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고구려의 자랑스런 후예다!
우리는 대고구려의 자랑스런 후예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10.10 1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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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을 보고-

모처럼 한국인의 긍지를 심어줄 영화가 선보였다. 추석을 맞아 최근 개봉한 ‘안시성’이 그것이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인 서기 645년. 고구려와 당나라의 대혈투, 국왕 연개소문과 성주 양만춘과의 정치적 갈등, 민생을 책임진 자의 위치에 있는 안시성주 양만춘 장군의 통솔력을 그린 블록버스터 영화다.

이 영화의 선전 문구에는 ‘대한민국이 열광할 초대형 액션 블록버스터’라고 자랑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본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과연 그럴만하다’고 할 수 있었다. 화면을 압도하는 전투장면과 인력동원 등은 감독의 역량을 한껏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이 영화가 내면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국가 간 강자의 위상과 약자의 초라함이다.

지금이나 천년 전이나 똑같이 외교는 언제나 힘의 논리가 지배했다. 힘없는 국가는 언젠가 강자에게 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 아니면 비슷한 세력끼리 동맹을 맺어야만 한다. 약자가 어떤 방법으로 든 살아남기 위해서다. 나당연합이나 나제동맹 등이 그렇다.

이번 안시성 전투는 수나라를 물리치고 정권을 수립한 당나라가 중국을 천하통일하면서 세력을 더 확장하려는 당의 팽창 정책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세민은 누구인가?

기울어가는 수 나라를 접수하고 당을 건국한 이연(재위 618~626년)은 고조라는 황제의 칭호를 얻어 군웅들을 누르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했다. 이연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이건성은 황태자로 책봉되었는데 행정과 내정을 맡아 국정에 관여했다. 차남 이세민은 전쟁터에 나가 외적을 물리치는 외치에 치중했다. 삼남 이원길은 첫째를 도와 국정을 뒷바라지했다.

개국 초기, 나라가 어수선할 즈음이라 당 고조는 둘째 아들 이세민에게 변방 부족을 물리치도록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터의 영웅은 국내외적으로 영웅 대접을 받았다.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세민의 위상이 장남보다 높아지는 건 뻔한 이치였다. 그러자 형제간에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일어난다.

왕가의 비극은 당나라가 개국하고 나서 8년 만에 벌어졌다. 이세민은 27세 때인 626년 왕궁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에 병사들을 매복시키고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유인해서 살해하고 목을 잘라 효수했다. 이 사건이 일명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현무문 정변(玄武門政變)'이다. 그러자 할 수 없이 당 고조는 이듬해 이세민을 태자로 다시 책봉한다.

이렇게 승승장구한 이세민은 당나라의 두 번째 황제인 당 태종(재위 627∼649년)으로 시호를 받고 통치하면서 외치에 눈을 돌려 고구려 침략을 감행한다.

 

고구려를 침공하라!

당나라 초기에 고구려와 당나라는 비교적 좋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야심을 버리지 않는 이세민은 631년에 당은 요서지역에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경관(京觀: 승전기념탑)을 헐어버리는 등 고구려를 자극하는 도발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자 고구려는 당나라가 침략할 때를 대비, 오늘날 농안(農安)지역인 부여성(扶餘城)에서 요동반도 남단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이 장성 축조의 감독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다.

640년 당이 서역지방의 통일하고 전열을 정비할 즈음 고구려 조정에서는 귀족들 간에 내분이 일어나, 연개소문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 등의 반대파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 연개소문이 왕위에 오른다.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당면한 대내외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강경한 대외정책을 펴방하고 이미 전쟁의 기운이 타오른 당에 대해 결연한 전투를 준비했다.

훗날, 백제와의 전투에서 수세에 몰린 신라는 김춘추를 평양에 보내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을 도모했으나 연개소문은 강경 정책을 고집하여 이를 거부했다. 이것이 뒷날 고구려의 안보에 치명적인 요소가 됐다. 신라가 660년 나당연합군을 편성해 백제를 멸망시킨 뒤 곧바로 힘을 키워 북방의 고구려를 치게 된 것이다.

고구려가 서쪽의 강대한 당제국과의 전쟁을 앞에 둔 상황에서 남쪽의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했으나 판단을 잘못함으로써 신라마저 적으로 만들어 양쪽의 협공을 받게 되어 결국 고구려가 멸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645년부터 시작된 여당전쟁은 668년 결국 고구려의 멸망으로 종결된다. 외교적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우쳐 주는 사례다.

영화에서 악역의 주인공인 당 황제 이세민은 중원 통일천하를 꿈꾸며 주변국을 복속시키기 위해 고구려의 연개소문에게 전 왕인 보장왕을 죽인 패륜왕이라며 죄를 묻고, 자신들의 동맹국인 신라를 괴롭힌 책임을 물어 마침내 644년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양국은 장기간의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당 태종은 645년 2월 요동으로 엄청난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요동성·백암성 등 주요 성들이 일시에 함락됐다. 15만명의 고구려군은 일시에 1만 명도 안 되는 패잔병만 남아 평양성으로 돌아갔으나 마지막으로 함락하지 못한 성이 바로 안시성이었다.

후방을 받쳐 줄 고구려 중앙정권의 지원도 없고 서방에서는 중원 최고의 전투력을 가진 당군이 밀려오는 고립무원의 위기에 몰린 안시성.

당군은 무시무시한 위력적인 성 공격무기였던 포거(抛車:큰 돌을 날려 보내는 투석기)와 충거(衝車:성벽을 파괴하는 돌격용 수레)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안시성은 지혜롭게 이를 물리쳤고, 무너진 성벽도 재빨리 수리하는 등 확고한 자세로 방어에 임하였다.

당군은 최후의 수단으로 안시성보다 높이 토성을 쌓아 성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하려 하지만 안시성 백성들은 지하에 굴을 파서 토성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이겨낸다.

장엄한 서사 드라마는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당태종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고 있으면서도 그 당 태종조차 함락하지 못한 안시성으로 인해 고구려의 위상 역시 엄청나게 커지게 된다.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라!

안시성 전투를 위해 당나라는 6부 상서 중 무려 4개 상서(병부, 예부, 이부, 형부)가 참전했고, 이들 외에도 종 3품~정3품 이상의 고관대작들과 정관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인 이세적과 황제의 오른팔 장손무기까지 참전한 드림팀이 고작 후방의 성 하나를 함락을 못시켜 패퇴한 셈이 되었으니, 그 명성은 두고두고 역사에 이어지게 됐다.

후대에 이어진 고려와 조선 역시 안시성 전투의 승전을 크게 자랑스러워했으며 그들을 당 태종을 물리친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했다. 여몽전쟁 말기에 고려가 결국 항복하려 하자 쿠빌라이 칸이 매우 기뻐하면서 '당 태종조차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영화 안시성에서는 자막에 한 줄로 흐르는 문구가 한국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천하를 통일하고 호령했던 당의 이세민은 중국 최고의 명군이지만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가장 잘못된 판단으로 고구려 침략을 손꼽았다. 그래서 훗날 사기에 이렇게 남겼다.

-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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