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양잠 사업 부흥…술집도 흥행
1910년대 양잠 사업 부흥…술집도 흥행
  • 최현웅 기자
  • 승인 2018.10.10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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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간 마을지기 김순철 이장
'황룡강이 시작되는 마을' 자부심

"노란꽃잔치로 마을 생기돌아요"
"귀농귀촌 문의하는 사람 많아요"

우덜사는 세상 19

장성읍 기산1리 내기·강변마을

김순철 이장
김순철 이장

오는 10월 12일부터 17일 동안 황룡강 일원에서 열리는 ‘2018 장성 황룡강 노란꽃잔치’가 시작되는 첫들머리 마을.

“마을의 골목길이며 상·하수도, 나무 한 그루까지 내 손 거치지 않은 게 없죠”

장성대교를 품은 장성읍 기산1리 김순철 이장(78)은 30여 년간 이 마을 이장을 도맡아온 전설적 인물이다. 때문에 마을 변천사며 인구 변화, 나무 한그루 존재까지 눈으로 생생히 지켜봐온 장본인이다.

이곳 마을도 대부분 노령인구인데다 70% 이상이 농사를 짓고 있다. 때문에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사람들이다.

“장성의 브랜드이자 상징과도 같은 노란꽃잔치가 열려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고 황룡강의 가치를 되찾게 되어 마을에 보람이 넘칩니다”라고 말하는 김 이장은 자신뿐 아니라 행사를 치르는 주민들 역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전한다.

김 이장은 “노란꽃잔치가 시작된 이후 마을의 몰라보게 발전하고 있다”며 “아름다운 풍광 뿐 아니라 공기까지 맑아 귀농·귀촌을 문의하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고 밝혔다. 덕분에 5~6년 전 부터 마을주변 땅값이 가파른 상승세이고, 빈집이 생겨도 집을 팔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이장은 젊은 시절 이곳저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쌓인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생활 탓에 한때 7년여 간 암 투병을 했다.

▲ 마을앞 입구에 식재된 수령 500여년이 넘은 왕버드나무. 원래 5그루가 있었는데 태풍으로 1그루가 쓰러지고 현재는 1그루만 남았다.
▲ 마을앞 입구에 식재된 수령 500여년이 넘은 왕버드나무. 원래 5그루가 있었는데 태풍으로 1그루가 쓰러지고 현재는 1그루만 남았다.

“집사람이 없었다면 지금 저의 존재는 상상도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김 이장은 치료기간 내내 몸에 좋다는 음식과 보약이란 보약은 모조리 구해와 간병해줬다고 회상하며 병원은 암을 발견하게 해줬지만 암을 낳게 해 준 이는 아내라며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빠트리지 않았다.

“고기 너무 많이 먹지마라. 독이 될 수도 있다”며 무분별한 육류섭취를 지양할 것을 권하는 김 이장은 젊은 시절 고기를 시도 때도 없이 먹었다가 탈이 났다며 암 완치 이후 직접 재배한 채소 위주의 식단과 꾸준한 운동, 규칙적인 생활이야말로 건강한 삶의 지름길이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김 이장은 지역과 농촌의 미래를 위해서도 수년간 헌신해왔다. 20여 년간 장성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촌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6년 남짓 동안은 후배 양성을 위해 지도자 회장을 하며 단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안 한 모범생이었다.

▲ 황룡강을 앞에두고 형성된 내기마을 전경.
▲ 황룡강을 앞에두고 형성된 내기마을 전경.

자녀들 모두 건강히 자신의 위치에서 잘살고 있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김 이장은 지금도 거뜬히 자급자족하고 있으며 자식들에게 도움의 손길 내밀지 않을 만큼 건강에는 자신 있다고.

그래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건강한 피부와 체격, 동안의 외모는 아직 60대로 밖에 안 보인다는 말들을 듣곤 한다.

이곳 내기마을은 마을 뒤쪽의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황룡강으로 빠져나가면서 마을의 기운이 빠져나간다고 해서 마을 앞에 왕버들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는데 그 후부터 오류촌(五柳村)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지금도 수령 500년이 넘은 왕버들나무가 나란히 다섯 그루가 장성군 보호수로 지정돼 있는데 한 그루는 몇 년 전 태풍에 쓰러졌고 지금은 네그루만 남아있다.

또 마을 앞에 흐르는 황룡강을 건너다닌다는 뜻으로 ‘거르재’라고 했다. ‘거르재’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주로 ‘안거르재’라고 부르는데 일설에는 목포에서 서울 가는 거리 중 함평에서 정읍까지 200리 거리 중간되는 곳으로 재보는 곳이라 해서 ‘거리재’라 하였다고도 한다. 또 다른 설은 나주목에서 전주목을 왕래하다보니 중간지점이 이 곳이라 보고 지금의 석송대가 있는 곳의 재를 양쪽으로 100리 되는 ‘거리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하나 이 모두 정확한 것은 없다.

 

내기마을 기운 보완…버드나무 심었던 ‘오류촌’

일제 강점기 대규모 양잠터…‘강변마을’

 

마을 뒤 서당골에 최초의 필암서원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수 십 년전 만해도 기왓장이 출토되기도 했으나 최근 장성군에서 몇 차례 조사에 나섰으나 뚜렷한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강변마을은 황룡강변에 제방을 막을 때 술집이 생기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1910년께 양잠을 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시라무라(사촌), 시무까, 요시다,

가미가와와 호랑이라는 별호로 불리던 일본인이 띄엄띄엄 집과 잠실을 짓고 살았으며, 마을 주위 100여 곳에 뽕밭을 조성하고 대규모의 양잠을 했는데 선채규, 반만석, 김양조, 이시가와(석천) 등이 서삼에서 옮겨와 뽕밭을 관리하고 기산리와 장성읍내에서 부녀자들이 일하러 들어오기도 했다.

1930년대에는 황룡강 방천을 따라 주막이 들어서고 한때 40여 호에 이르기도 했다. 해방 후 기판서가 동양척식회사의 땅 100마지기를 구입해 들어왔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 이농 현상으로 30여 호의 작은 마을로 전락했으나 지방자치 시대를 맞고 나서 공설운동장과 황룡강 수변길 개발, 노란꽃축제 등의 영향으로 이곳 일대 마을이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황룡강에 둑을 막은 후 처음에는 방천거리’라 부르다가 6·25후부터 황룡강변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강변이라 부른다.

▲ 기산1리는 내기마을 뿐 아니라 장성대교 인근 강변마을을 포함하고 있다.
▲ 기산1리는 내기마을 뿐 아니라 장성대교 인근 강변마을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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