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하면 월성리 금계사 (1)
북하면 월성리 금계사 (1)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10.10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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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게 없다고 실망하지 말아야.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는 있는 것,
다만 그 가치를 몰라 불행이라 느끼는 것입니다"
장성군 북하면 월성리 산자락에 자리한 금계사의 약사전. 16년의 사찰 연륜이지만 주지 창진 스님이 한 땀 한 땀 불성을 엮어 오늘의 도량을 일구었다.
장성군 북하면 월성리 산자락에 자리한 금계사의 약사전. 16년의 사찰 연륜이지만 주지 창진 스님이 한 땀 한 땀 불성을 엮어 오늘의 도량을 일구었다.

< 山寺의 향기 8  >

부질없는 속세의 잡소릴랑 깃털처럼 날려버리고 진심의 소리를 찾아가자.

훠이 훠이~~

훠이 훠어이~~

저간의 여타 것들을 물리치고 가볼 곳은 산속이라.

그곳엔 진리가 있을까?

그도 아니면 진리를 구하려는 구도승이 계시지나 않을까?

그래서 가본 곳이 장성군 북하면 월성리 금계사(金鷄寺)였다.

장성읍에서 백양사 쪽을 향해 한 달음 가다가 담양 한재골로 나가는 월성계곡으로 접어든다. 한참 뒤에 금계사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이 맞아 네비에게 쉬엄쉬엄 길을 묻는다. 입구에 월성저수지의 잔잔한 물결과 건너편엔 장성산림욕장을 두고 있어 경관이 일품이다.

이곳은 월성리 두무동(杜舞洞)이라고 부르는데 협곡처럼 산이 늘어져 ‘산과 산이 맞닿아 흡사 문을 달아 놓은 것 같다’하여 두문동(杜門洞)이라 했다는 설과 ‘중국의 유명한 지관 두사춘(杜士春)이 이곳을 지나면서 산세가 좋아 춤을 추었다 하여 이름 붙였다’하여 두무동(杜舞洞)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월성리는 예전에 한재골로 넘나드는 고갯길 도로가 없을 때엔 30리가 넘는 산길을 걸어 읍내까지 학교에 다녀야하는 오지 중의 오지마을 이였다. 1986년 월성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가뭄으로 농사짓기가 어려웠고 일제 강점기까지도 숯을 굽거나, 한지를 만들어 팔고 살았다. 전통적으로 감 주산지여서 감을 등에 지고 나가 목화 등을 물물교환하기도 했다.

▲ 지금의 금계사가 자리 잡은 곳은 예부터 절통골로 불려져 왔다. 이곳 인근에는 선인앙천(仙人仰天)이라 하여 신선이 하늘을 쳐다보는 천하의 명당터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구전에 임진왜란 때까지 큰 절이 있었으나 왜적들이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 지금의 금계사가 자리 잡은 곳은 예부터 절통골로 불려져 왔다. 이곳 인근에는 선인앙천(仙人仰天)이라 하여 신선이 하늘을 쳐다보는 천하의 명당터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구전에 임진왜란 때까지 큰 절이 있었으나 왜적들이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도로가 훤히 뚫려 낭만이 섞인 곳이지만 마을 사람이라곤 찾아보기가 어렵다. 드문드문 사과나무와 감나무가 가을의 정취를 말해 줄 뿐...

마을을 뒤로하고 금계사에 도달하니 이곳에도 인적이 없다.

말 그대로 텅 빔이다.

절은 그래야 맛일까?

아무리 산중 절간이라 하더라도 스님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고, 법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맛이 날 텐데 요즘 절들은 이런 상황인가?

나만의 속물적 판단일까?

잠시 뒤에 예를 갖춰 기다리니 주지인 창진 스님을 뵐 수 있었다.

한눈에 뵈어도 보통이 아니신 분이다. 산사의 맑은 기운과 부처님의 자비가 몸에 스며든 듯 엄청난 내공을 지닌 분으로 비친다.

금계사의 유래를 듣자니 예부터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절통골’로 불러왔단다. 옛날부터 절이 있었다고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지명으로 불당이 있었다 하여 ‘북당골’, 용구산 아래 큰 절이 있었다 하여 ‘큰 은적골’, 작은 절이 있었다 하여 ‘작은 은적골’이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합니다. 창대한 불법의 진리를 배우고 중생을 계도하고 싶은 꿈이 있다면 그를 위해 매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가 이곳으로 들어온 지가 16년 됐는데 알 수 없는 상서로운 기운이 이끌려 한달음에 이곳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세 필지로 나눠진 이 절 부지를 아침에 한 필지, 낮, 저녁에 한 필지씩 단 하룻만에 매입하고 곧 바로 불사에 착수하게 된 것입니다”

불태산 계곡으로부터 흐르는 맑은 물줄기의 정기를 품고 있는 금계사. 이 도량은 창진 스님의 불국정토를 향한 열정이 하나하나 녹아있는 곳이다.
불태산 계곡으로부터 흐르는 맑은 물줄기의 정기를 품고 있는 금계사. 이 도량은 창진 스님의 불국정토를 향한 열정이 하나하나 녹아있는 곳이다.

금계사 창건 계기를 설명하는 창진 스님은 그때부터 불타오르는 불심을 사찰 창건에 쏟아 오늘날의 도량 터를 일궜다. 바위하나, 돌멩이 하나, 못 한 개라도 스님의 땀이 서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산속에 5인용 텐트를 치고 나무를 파내고 깎고 다듬고, 터를 다듬고 미장을 하여 기단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한 인간의 의지와 열정만으로 도량을 닦고 창건한다는 것은 나라를 개국한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비유한다. 그래도 그때는 비교적 젊어서 다행이었다.

아직도 도량 가꾸기엔 끝이 없지만 이제는 조금이나마 스님이 당초에 꿈꾸었던 불국토를 그려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지만 앞으로도 금계사는 영원히 깨달음을 향한 절로 남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비록 개인사찰이지만 누구든 행여라도 개인 적인 욕심으로 사찰을 소유하거나 개인적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법적 제도를 마련해 놨다. 말하자면 ‘금계사는 영원히 금계사로 남으라’는 창건주이자 주지 스님의 뜻이다.

그래서 창진 스님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제는 불국정토를 위해 목탁을 두드리며 정진하는 길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합니다. 창대한 불법의 진리를 배우고 중생을 계도하고 싶은 꿈이 있다면 그를 위해 매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속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동신경이 발달하여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에게는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주고 능력을 키워줘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선수나 코치가 되고, 체육교사나 활동적인 직장인이 될 것 아닙니까?

또 도둑질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하도록 허락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풀어지고 살맛이 나는 겁니다. 다만 도둑질도 좋은 도둑질, 즉 강자를 무릎 꿇리고 약자를 돕는 정의로운 도둑질을 하도록 유도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둑질하는 것을 연구해서 더 나쁜 도둑들이 판을 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그의 몫입니다”

잔잔하게 흐르는 창진 스님의 말씀은 하나하나가 법문이자 계율처럼 들렸다.

스님은 현대인들이 너무 많은 스트레스와 불만이 사로잡혀 있다고 안타까움을 설한다.

“가진 것이 없다고 결코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가지지 못해서 위축되거나 불행하다고 느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 돈을 지키기 위해 불안하고 형제간에 싸우며 탈세로 고통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한 가지가 없다면 다른 한 가지는 있다는 진리를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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