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병운동의 사령탑 ‘장성 석수암’ 복원 시급
호남의병운동의 사령탑 ‘장성 석수암’ 복원 시급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10.2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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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0월 30일-호남창의회맹소 결성
전라도의병의 60%가 장성 출신 ‘자부심’
장성부지도에 그려진 석수암 암자터선조 33년에 제작한 장성부(長城府)지도에 나타나있는 석수암 터. 왼쪽 하단부에 기와집 암자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는 잡초만 우거져 흔적조차 알기 어려운 실정이다.
장성부지도에 그려진 석수암 암자터선조 33년에 제작한 장성부(長城府)지도에 나타나있는 석수암 터. 왼쪽 하단부에 기와집 암자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는 잡초만 우거져 흔적조차 알기 어려운 실정이다.

잡초 우거진 황룡면 관동리 석수암 터 

지금으로부터 111년 전인 1907년 10월 30일, 기삼연 의병장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구국의 의지를 모으고 대내외에 항일 의병운동의 신호탄을 다시 쏘아 올렸다. 그 진원지는 장성 수연산 석수암이다. 지금의 황룡면 관동리 수연산 일대로 알려져 있다.

고증자료에 의하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란 1907년 호남지역에서 기삼연(奇參衍)을 중심으로 결성된 의병연합부대라고 언급돼 있다. 한마디로 해석하자면 호남지역 의병들의 사령탑으로서, 총괄 지휘소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가 발행한 ‘폭도편책’이라는 자료에서 당시 조선 폭도(의병운동)의 70~80%가 전라도에서 일어났으며 전라도 의병의 60~70%를 장성 출신 의병들이었다고 적고 있다. 거꾸로 해석하자면 조선 구국.의향 정신의 본체는 전라도 정신이며, 전라도 정신의 본체는 장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사의 현장이자 후예들인 장성군이 이런 역사적인 기념일을 잊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진정한 의미에서 장성인의 기개를 드높이고 자긍심을 가질 현장이지만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18일 시민단체인 ‘장성희망촛불’과 ‘장성시민연대’ 공동주최로 장성공공도서관에서 열린 ‘장성역사 톺아보기’ 강좌에서 강사로 참석한 기호철 교수는 “장성 역사를 드높일 가치 있는 자료는 무궁무진하다. 그 역사의 흔적들을 모아 스토리텔링하여 장성화(長城化)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통틀어 호남인의 기개를 말해주는 가장 큰 사건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항일의병운동이다.

1907년 10월 30일, 전라남도 장성의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庵)에서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의 의병부대를 포함한 4∼5개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창설된 것이 호남창의회맹소였다.

이는 해체되던 1908년 1월까지 호남지역 의병봉기에 매우 큰 영향을 주어 후기의병운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08∼1909년 호남지역이 의병항쟁의 중심무대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의병운동은 호남의병의 거점지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조선의 전체 의병운동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며 활화산으로 타오르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호남창의회맹소(이하, 회맹소)는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가 주도하고 기삼연(奇參衍)이 참여했던 일심계(一心契)라는 계조직과 장성의 유림이 연합하여 만든 것이었다.

주요 참가자는 대부분 장성·영광·고창 등 호남 중서부에서 거주하였고, 상당수가 이 지역의 저명한 유림지도자인 노사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었다. 특히 기삼연은 기정진의 재종질이면서 그 보다 5살 많은 의병장 기우만(奇宇萬)의 삼종숙이었다. 이들은 유교 특유의 춘추의리(春秋義理)에 투철하였고 배외의식(排外意識)이 강한 양반 유림이었다.

 

체포된 기삼연, 절차 없이 처형되다 

회맹소의 활동이 나날이 기세를 떨치자 일본 측은 1908년 1월 25일부터 11개 부대를 편성하여 3월 초까지 회맹소에 대한 대규모 진압작전을 펼쳤다. 이 기간에 회맹소는 200여 명의 희생자를 내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추위를 피하고 최대의 명절인 설을 보내기 위해 담양 추월산(秋月山)의 금성산성(金城山城)에서 지내려던 회맹소의 계획이 일본 측에 발각되어,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의병장 기삼연도 부상을 입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기삼연은 회맹소를 통령 김용구에게 맡기고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전라북도 순창에 은신하였으나 1908년 2월 2일 체포되었고, 일본군은 기삼연을 광주로 압송한 뒤 정식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2월 3일 처형하였다. 이로써 기삼연이 주도하던 호남창의회맹소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회맹소의 활동은 통령 김용구를 비롯해 김준·이철형·김기순·박도경·이영화·김공삼(金公三)·김율(金聿) 등에 의하여 지속되었다. 이 밖에도 회맹소의 과감한 반일투쟁에 고무되어 의병을 일으키려는 세력이 크게 증가했다.

회맹소는 1907년 10월 말부터 1908년 1월 말까지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회맹소는 대외 선전과 반일(反日) 무장투쟁을 병행하였다. 미곡 유출 방지, 외래품 판매 금지, 납세 거부, 자위단(自衛團)에 참여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이들의 본격적인 무장투쟁은 1907년 10월 30일 무장분파소(茂長分派所) 습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고창읍성을 점령하고, 12월에는 영광의 법성포(法聖浦)를 공격하여 쌓아 둔 세곡(稅穀)을 빼앗아 일부는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일부는 군량미로 비축하였다. 1908년에 들어서도 전라도의 중서부 지방인 장성·영광·담양·고창·함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회맹소의 병력은 약 400∼500명 규모를 유지했다.

항일운동 사적지인 장성향교정부가 장성의 대표적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로 정리하고 있는 장성향교의 모습. 이 장성향교는 구한말 장성의병들이 창의를 다졌던 곳이다.
항일운동 사적지인 장성향교정부가 장성의 대표적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로 정리하고 있는 장성향교의 모습. 이 장성향교는 구한말 장성의병들이 창의를 다졌던 곳이다.

장성 항일 의병사 재조명 시급하다 

일제 측은 1906년∼1909년 호남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최익현·고광순(高光洵)·기삼연·김준·김율(金聿)·전해산·심남일·안규홍(安圭洪) 등을 지목했다. 이들 가운데 기삼연, 김준, 김율, 전해산, 심남일 등은 모두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한 의병장들이었다. 따라서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지역 의병봉기에 매우 큰 영향을 주면서 1908∼1909년 이 지역이 의병항쟁의 중심무대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세력으로 평가된다.

호남창의회맹소였던 석수암은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수연산 중턱에 있던 암자였다. 암자 뒤 벼랑 바위틈에서 우물이 솟아나므로 석수암이라고 하였다. 창건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27년에 나온 《장성읍지》에 따르면 1908년 불탄 것을 1926년에 김형종(金炯鍾)이 중건했다고 한다.

석수암 터는 현재 군부대 소속으로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소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져 그 위치를 찾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장성의 기개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호남의병사의 재조명 작업과 동시에 구한말 의병운동의 참모기지였던 석수암을 복원·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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