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10.31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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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오랜만에 선배로부터 문자가 왔다.

「10ㆍ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이라는 선배의 이름과 간단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아!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만 40년 전, 그 날의 기억을···

그때 필자는 푸릇푸릇한 대학생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용봉동 뒷골목에서 막걸리를 좋아하고, 서클활동에 몰두하고, 미팅이란 것도 쏘다니곤 했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면 ‘루루 라라’ 좋아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박정희 저격 사건이 발생한 하루 뒤, 10월 27일 TV에서 영문도 밝히지 않는 ‘대통령 유고’가 발표되고 대학가는 무기한 휴학이 선언됐다. 연일 대학가의 데모로 시끌벅적하던 시기라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면서도 휴학이란 말에 ‘얼시구’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대통령 유고’를 만들어 낸 연극무대의 주인공인 김녕(金寧)씨의 후손인 김재규. 박정희와 같은 경북 출신이지만 9살 적은 1926년 출생이다. 1980년 1월 28일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으로 사라진다.

그 김재규를 바르게 평가해야 한다는 운동을 이끌고 있는 선배의 문자를 보며 40년 전과 후를 다시 생각한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상상 불가다. 어쨌든 역사의 수레바퀴를 한 순간에 멈추게 한 장본인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를 다시 보기 위해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을 찾아보자.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포승줄에 묶인 김재규가 판사를 향해 포효하는 항변은 당시의 역사가 순항하는데 반드시 넘어야 할 문턱으로 박정희의 제거를 꼽았다. 그가 말한 혁명의 5가지 목적은 시대적으로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최인규와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차지철과 분쟁이 있기 전까지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급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물론 이런 항변은 자신의 행위를 명분 있는 역사적 거사로 만들기 위한 변론이었다.

김재규 본인은 1979년 12월 18일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라고 주장했다.

설령 군사정권에서 사형으로 사라질 망정, 혁명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길 바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 알려진 저격 원인의 정설은 박정희의 무조건적인 차지철 청와대경호실장 신임과, 그로 인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위상 추락, 그리고 그 둘 간의 연이은 갈등 때문에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고 보고 있다.

10월 26일 박정희 저격사건이 일어난 지 40년이 흘렀다.

역사의 진실은 좀 더 훗날 밝혀질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진지한 연구가 이어져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진실이 진짜 역사로 바로 적히길 기대한다.

역사는 과거사 일지라도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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