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년전 화려했던 성산의 장성부 관아 ‘아 옛날이여’
156년전 화려했던 성산의 장성부 관아 ‘아 옛날이여’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11.2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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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천제아도⌟에 나타난 장성관아 옛 모습
지금의 성산초 일대 호남치소 본거지 입증

지역사(地域史)는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를 여는 역사교과서다.

우리 과거사를 모르면서 미래를 표방한다는 것은 사상누각이다. 미래를 그리는데 필요한 정체성을 지역사에서 찾아 나가야 한다. 기초자치단체인 장성군의 경우 장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는 지역개발과 미래 비전의 초석이다.

본보에서는 지역 전문가의 자문을 토대로 지역사 되찾기 운동에 본격 나설 예정이다. 그 첫 번째 과제가 1856년 제작된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 속의 장성부 지도 읽기다.

⌜숙천제아도⌟는 서울 출신의 관료인 한필교(韓弼敎 1807~1878)란 사람이 자신이 일평생 관직에 부임해 재직한 여러 관아의 모습을 화공에게 그리도록 한 화첩이다. 숙천제아도이란 ‘여러 해 동안 머물렀던 여러 관아의 그림’이란 말이다. 그 화첩 가운데 1856년부터 1857년간에 장성부사로 부임한 장성부(長城府)의 관아와 인근 마을, 산천, 도로 등의 모습을 담아 펴낸 부분이 있다.

한필교는 서문에서 화첩을 제작한 취지를 밝히면서 “그림은 사물을 본뜬 것이니 하늘에 덮여있는 것과 땅에 실려 있는 모든 오묘한 것을 다 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년의 오랜 세월이나 만리의 먼 곳의 사물까지도 실제와 같이 생각해 낼 수 있으니 참으로 도움 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기록의 소중함과 가치를 담은 서문이다.

본보에서 이 장성부 지도를 입수, 특집으로 엮어 소개한다.

⌜숙천제아도⌟는 불행히도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숙천제아도⌟ 속에 장성부 관아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 국내 연구진에게 소개한 사람은 장성 출신 기호철 교수(서울대 고병리학)로 알려지고 있다.

본보에서는 이 ⌜숙천제아도⌟를 장성공공도서관(관장 김점수)에 구입을 의뢰, 긴급 입수하여 특집으로 엮어 소개한다.

- 편집자 주- 

156년 전 장성부(長城府) 모습장성부사로 재임한 한필교가 그린 1856년도 장성 성산에 위치한 장성부 관아도. 숙천제아도에 기록된 이 그림은 미국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에 소장돼있다. 왼쪽의 황룡강과 서울 가는 거경대로, 관아주변의 민가와 장터, 아래쪽의 유탕촌 풍경은 불과 156년 전 장성 고을민의 삶을 추론케 하고 있다. 중앙 하단부에 원형 담으로 둘러싸인 곳은 옥(獄)이라 표시돼있어 이 일대가 감옥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156년 전 장성부(長城府) 모습장성부사로 재임한 한필교가 그린 1856년도 장성 성산에 위치한 장성부 관아도. 숙천제아도에 기록된 이 그림은 미국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에 소장돼있다. 왼쪽의 황룡강과 서울 가는 거경대로, 관아주변의 민가와 장터, 아래쪽의 유탕촌 풍경은 불과 156년 전 장성 고을민의 삶을 추론케 하고 있다. 중앙 하단부에 원형 담으로 둘러싸인 곳은 옥(獄)이라 표시돼있어 이 일대가 감옥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저자 한필교는 누구인가? 

벌열가문 청주한씨 후손… 
1856년 장성부사 재임   

조선말기 문신으로 조선중기 우의정을 지낸 한응인의 후손이다. 청주 한씨는 조선 전 시기를 통들어 11,058명의 문과급제자 중 240명이 청주 한씨 가문 출신이며 왕비를 6명이나 배출할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다. 조선후기 양반가문 중에서도 최상위 권력층으로 대대로 벼슬하면서 정치적사회적 특권을 누린 벌열가문(閥閱家門: 또는 경화세족(京華世族)으로도 불린다)이었다.
이런 가문을 바탕으로 그의 나이 183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서를 통해 관로에 진출했다. 또 그의 아들 한장석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의 높은 벼슬에 올라 훗날 한필교의 노년을 화려하게 보장한 은혜를 베풀기도 했다.
한필교는 풍산 홍씨의 홍석주의 딸과 결혼하는데 홍석주는 1834년 좌의정에 오른 사람으로 한필교가 처음 벼슬길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 청주한씨와 풍산 홍씨 집안은 대대로 권세를 누리기도 했지만 학문과 시서를 좋아하고 서책류나 고동서화의 수집과 예술품 소장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한필교가 화원을 고용하여 근무지마다 관아도를 그리게한 것도 이런 가문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장성부 위치와 한필교의 부임 행차
전주까지 170리…동서 45리.남북 70리

〈장성부 15쪽 그림 전라도 북쪽으로 서울까지 660리, 순영이 있는 전주까지 170리, 병영이 있는 강진까지 170리, 좌수영이 있는 순천까지 290리, 우수영이 있는 해남까지 300리다.
동서가 45리, 남북이 70리다. 동쪽으로는 창평 경계까지 25리, 서쪽으로 영광 경계까지 20리,남쪽으로 광주경계까지 30리, 북쪽으로 정읍 경계까지 40리다.
병진년(1856년) 2월 17일 정사에 사복시 첨정에서 장성부사에 제수됐다. 3월 3일체 조정에 사례하고 길을 떠나 25일 (장성)관아에 이르렀다.〉
이상은 한필교가 장성부를 그리면서 지도위에 남길 부임 내력이다. 그림 15도라는 말은 숙천제아도에 그린 그림의 15번째란 뜻이다. 그는 이처럼 한 곳에 부임할 때 배경과 이력, 그 곳의 위치나 부임 행차까지 소상히 밝혔다. 특히 지방의 경우 서울을 중심으로 인근 관아와의 거리와 도로 사정을 밝혀 훗날 정사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그는 이곳에 부임하기 직전에 유배를 당했으나 더 높은 벼슬인 부사직으로 복귀, 장성에 부임하는 행운을 얻는다. 그의 행장기에 따르면 장성에서 2년간 재임한 것으로 되어있다.

 

오늘날 장성 땅과 당시의 지도읽기

서울 가는 국도1호선 도로변 흔적 역력  

동산은 성산공원, 화산은 꽃뫼, 향교는 그대로  

장터는 기술센터자리, 유탕리 입구엔 감옥까지

 

성산초 교정에 남아있는 옛 관아 건물의 주춧돌현재 성산초등학교 교정에 남아있는 정성부사터의 추춧돌과 비석들. 기호철 교수는 “언젠가 확인할 필요가 있을 때 이 부근의 흔적들을 발굴해 소중한 지역사 재인식의 자원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산초 교정에 남아있는 옛 관아 건물의 주춧돌현재 성산초등학교 교정에 남아있는 정성부사터의 추춧돌과 비석들. 기호철 교수는 “언젠가 확인할 필요가 있을 때 이 부근의 흔적들을 발굴해 소중한 지역사 재인식의 자원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아의 윗 부분에 있는 야산인 동산(東山)은 지금의 성산공원으로 예상된다. 남향을 하고 있는 관아터의 현재 위치는 성산초등학교 자리로 보인다.
성산초등학교는 원래 관아 자리였으나 1921년 관아가 폐쇄되고 현재의 영천리 군청 자리로 이전하면서 학교가 들어서게 된다. 이를 입증하듯 현재 성산초 교정 안에는 1888년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부사 김공승불망비와 옛 관아의 주춧돌 석주, 당간 등이 남아있다. 또 교정 안팎에는 수령 1백여 년을 훨씬 능가하는 느티나무가 여러 그루 산재해 있다.
맨 위쪽의 삼문산(三門山)은 야은리 뒷산, 화산(花山)은 꽃뫼로 불리는 산이다. 맨 왼쪽 위의 팔양산, 맨 오른쪽 끝자락의 성자산은 지금의 지명 그대로다.
대부분이 건물이 모두 흔적조차 없어진 것과 달리 오른쪽 장성향교만은 그 자리에 남아있다.
지도 맨 하단의 이척산의 지금의 이제산성으로 잘 못 불리는 곳이며, 고제봉은 현재의 제봉산으로, 금협(錦峽)은 예전에 황금치로 불리던 곳으로 지금의 유탕골 가는 길의 금수협, 또는 금협으로 추정된다.
지도 왼편의 굵은 선은 서울로 향하는 거경대로(距京大路)~남쪽으로 향하는 남거대로(南距大路)라고 표시돼있는데 지금의 국도1호선에 해당하는 도로다. 이 도로의 양쪽에는 ‘관괴’라 하여 관청에서 심은 가로수인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식재돼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도 중앙부에 장기(場基)라고 돼있는 장터는 지금의 농업기술센터자리이며 유탕촌은 예전에도 상당수 민가가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표기돼있다. 그 옆의 강무당(講武堂)은 군사훈련장이었는데 지금의 성산초등학교 운동장 부근으로 보인다.
부사 관청의 하단부에 당시 지방행정의 보좌 역할을 하던 향청과 사창, 관노청, 영정 등의 부속 관청이 옹기종기 둘러 배치돼있다. 유탕촌에서 흘러나오는 개울 끝에 둥근 담으로 둘러쳐진 감옥(獄)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사실은 장성부가 지역행정의 중심지로서 행정과 군사, 사법기능, 학교, 시장의 기능을 두루 갖춘 곳이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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