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 최현웅 기자
  • 승인 2018.03.19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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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에도 끄떡없었던 가족 같은 마을
약수1리(학림마을) 오동일 이장.
백양사와 가깝지만 실질적 혜택은 글쎄…….
약수1리(학림마을) 오동일 이장

 

“도시로 떠난 젊은이들이 고향 찾아 귀향했으면 좋긴 하겠지만 농사도 시원찮고 벌어먹고 살것이 없응께 선뜻 내려오라고 말도 못하제...”

산세 좋고 물 맑은 청정마을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벌어먹고 살길 찾아 도시로 떠나 버리고 40여 가구가 채 안 되는 마을엔 고즈넉한 구름만 쉬어가는 듯 무심히 흐르는 곳. 올해로 13년째 이장을 맡고 있다는 북하면 약수리 1구 오동일 이장(77세)은 태어나 단 한 번도 이 마을을 떠나본 적 없는 알짜배기 토박이다.

학림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약수1리는 약 200여 년 전 남양 방 씨 일가가 인접한 중평마을에서 옮겨와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뤄 살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110년 전 김해김씨 일가가 정읍에서 들어와 4대째를 이어오고 있으며 100여 년 전 에는 제주 고 씨가 담양에서 옮겨와 3대째 살고 있으나 이들 모두가 이제는 한두 집에 불과 하거나 이미 집성촌의 의미를 잃은 지는 오래됐다. 일제 때는 일본인 나까사와와 고바야시라는 사람이 살다가 떠났고 그 외 성씨는 6.25전후에 들어와 살게 됐다고 한다. 예전에는 마을 대부분이 약수천이었는데 산 밑에 한 두 집이 살기 시작해 점차 넓어지게 됐다고 한다.

장성투데이가 찾은 그날도 마을 노인정엔 오 이장만 덩그러니 앉아 취재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을 한 가운데 자리한 느티나무만이 400년도 훨씬 넘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이 마을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440여간 이 마을 지켜온 느티나무
440여간 이 마을 지켜온 느티나무

 

6.25 동란당시 9살쯤 이었을 거라고 기억하는 오 이장은 마을 뒷산에 주둔했던 국군에게 주먹밥을 지어 날랐던 기억을 더듬으며 그 끔찍했던 전쟁통에도 이 마을은 그리 큰 피해를 입거나 상한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읍내와도 거리도 먼데다가 백양사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작은 마을이라는 지리적 조건 탓에 국군이든 인민군이든 크게 개의치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무엇보다 순박하고 한 가족처럼 서로 돕고 사는 이웃들이었기에 좌우의 이념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지 않았겠냐고 진단한다.

지난 70년대에는 주민들이 50여 가구도 넘게 살았었던 적도 있었다고 회상하는 오 이장. 지금은 가구 수와 주민 수만 줄어든 게 아니라 농사짓는 사람마저 줄어들어 마을 소득원조차 말라 버렸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곶감농사가 마을의 제법 쏠쏠한 소득원이었지만 요즘엔 곶감을 먹는 사람도 없을 뿐 더러 너도 나도 곶감을 출하하다 보니 이제는 이마저도 자녀가 오면 주려고나 하지 시장에 내다팔 생각은 크게 없다고 한다.

40여 가구 중 논농사를 짓는 가구도 5가구가 채 안되기 때문에 농번기 때도 홀로 사시는 어머님들은 마을 여성 노인정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거나 소일거리 화투를 치신다. 집만 따로 살지 그야말로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웃사촌이다. 근래 들어 복지혜택이 늘어 보건소에서도 어르신들의 안부와 건강을 챙기러 오는 등 요샌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고 너털웃음을 웃으시는 오 이장. 장성투데이 창간호를 드리고 왔더니 한참 후에 전화로 좋은 신문 잘 읽어 고맙다 시며 농촌에는 농인들이 태반이라며 노인들 읽기 좋게 활자크기를 키워 달라신다. “환한 웃음 잃지 않으시고 건강하시라”고 말씀 드렸다.

학림마을 입구
학림마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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