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1리(학림마을) 오동일 이장.
백양사와 가깝지만 실질적 혜택은 글쎄…….
“도시로 떠난 젊은이들이 고향 찾아 귀향했으면 좋긴 하겠지만 농사도 시원찮고 벌어먹고 살것이 없응께 선뜻 내려오라고 말도 못하제...”
산세 좋고 물 맑은 청정마을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벌어먹고 살길 찾아 도시로 떠나 버리고 40여 가구가 채 안 되는 마을엔 고즈넉한 구름만 쉬어가는 듯 무심히 흐르는 곳. 올해로 13년째 이장을 맡고 있다는 북하면 약수리 1구 오동일 이장(77세)은 태어나 단 한 번도 이 마을을 떠나본 적 없는 알짜배기 토박이다.
학림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약수1리는 약 200여 년 전 남양 방 씨 일가가 인접한 중평마을에서 옮겨와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뤄 살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110년 전 김해김씨 일가가 정읍에서 들어와 4대째를 이어오고 있으며 100여 년 전 에는 제주 고 씨가 담양에서 옮겨와 3대째 살고 있으나 이들 모두가 이제는 한두 집에 불과 하거나 이미 집성촌의 의미를 잃은 지는 오래됐다. 일제 때는 일본인 나까사와와 고바야시라는 사람이 살다가 떠났고 그 외 성씨는 6.25전후에 들어와 살게 됐다고 한다. 예전에는 마을 대부분이 약수천이었는데 산 밑에 한 두 집이 살기 시작해 점차 넓어지게 됐다고 한다.
장성투데이가 찾은 그날도 마을 노인정엔 오 이장만 덩그러니 앉아 취재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을 한 가운데 자리한 느티나무만이 400년도 훨씬 넘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이 마을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6.25 동란당시 9살쯤 이었을 거라고 기억하는 오 이장은 마을 뒷산에 주둔했던 국군에게 주먹밥을 지어 날랐던 기억을 더듬으며 그 끔찍했던 전쟁통에도 이 마을은 그리 큰 피해를 입거나 상한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읍내와도 거리도 먼데다가 백양사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작은 마을이라는 지리적 조건 탓에 국군이든 인민군이든 크게 개의치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무엇보다 순박하고 한 가족처럼 서로 돕고 사는 이웃들이었기에 좌우의 이념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지 않았겠냐고 진단한다.
지난 70년대에는 주민들이 50여 가구도 넘게 살았었던 적도 있었다고 회상하는 오 이장. 지금은 가구 수와 주민 수만 줄어든 게 아니라 농사짓는 사람마저 줄어들어 마을 소득원조차 말라 버렸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곶감농사가 마을의 제법 쏠쏠한 소득원이었지만 요즘엔 곶감을 먹는 사람도 없을 뿐 더러 너도 나도 곶감을 출하하다 보니 이제는 이마저도 자녀가 오면 주려고나 하지 시장에 내다팔 생각은 크게 없다고 한다.
40여 가구 중 논농사를 짓는 가구도 5가구가 채 안되기 때문에 농번기 때도 홀로 사시는 어머님들은 마을 여성 노인정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거나 소일거리 화투를 치신다. 집만 따로 살지 그야말로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웃사촌이다. 근래 들어 복지혜택이 늘어 보건소에서도 어르신들의 안부와 건강을 챙기러 오는 등 요샌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고 너털웃음을 웃으시는 오 이장. 장성투데이 창간호를 드리고 왔더니 한참 후에 전화로 좋은 신문 잘 읽어 고맙다 시며 농촌에는 농인들이 태반이라며 노인들 읽기 좋게 활자크기를 키워 달라신다. “환한 웃음 잃지 않으시고 건강하시라”고 말씀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