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이 쌍기를 만났을 때
광종이 쌍기를 만났을 때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8.12.05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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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천년을 이어온 과거제도가 시작됐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만남은 상대적으로 작용하여 서로를 변화시키며 인생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비록 그것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현재 대한민국에서 수직적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는 제도는 사법·행정고시제도를 통한 관료 진출과 투표를 통해 발탁되는 선출직 당선을 꼽을 수 있다.
주민투표로 자치단체장과 의원을 뽑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것은 1995년이지만 시험을 통해 인재를 발탁하는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때부터이니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신분의 파격적인 상승을 노릴 수 있는 과거제도는 어떻게 도입됐을까? 광종이 중국의 쌍기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떠했을까?
수백만의 다문화 가족이 살고 있고 글로벌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 중국의 귀화 인물인 쌍기의 개혁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다문화 시대 장성의 살길은 무엇일까.

 

광종, 왕권 위해 피를 묻힐 각오를 하다.

제4대 왕 광종(925~975)은 왕건의 3남으로 즉위할 때 25살의 혈기왕성한 젊은이였다. 혜종이나 정종보다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세력 또한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호족세력이었다. 이 때문에 언제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고려의 둘째 왕 혜종은 배 다른 형제들에 의해 제거되었고, 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셋째 왕 정종도 불과 4년 만에 세상을 등졌다. 광종은 왕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궁궐 주변의 세력과 지방 호족들에 대한 두려움이 상존했다.
두 형들이 나약한 탓에 비참하게 왕권을 빼앗긴 교훈을 체험한 광종은 두 형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호족을 비롯한 공신들을 제거하여 왕권과 고려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필연적으로 제도를 개혁하고 피를 묻힐 것을 각오한다. 당시만 해도 고려에는 호족의 자제들이 신분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음서제가 왕성했다. 그런데 호족들의 엄청난 반발을 정면 돌파하며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는 과거제를 처음 도입한다.
이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9년인 958년 4월 16일 처음 실시되고 마지막 과거는 1894년 5월 15일 치러졌으나 갑오개혁으로 폐지된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사법·행정고시는 이러한 제도의 후속인 만큼 무려 과거제도는 1060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인재선발 제도다.

광종과 쌍기의 만남은 956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쌍기는 혼란기 중국 후주(後周 951-959) 사신단의 일원이었다. 당시 광종은 32살로 재위 7년째를 맞고 있는 때였다. 쌍기의 나이는 광종과 비슷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후주의 사신으로 고려에 온 쌍기가 오랜 여정으로 병에 걸려 귀국하지 못하고 고려에 남으면서 시작된다.
쌍기가 병에 걸리자 고려의 신료들이 병문안을 가서 찾아보고 하는 과정에서 쌍기의 인물 됨됨이가 조정에 알려진다. 광종 역시 사신단으로 왔던 후주의 신하가 돌아가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던 차에 쌍기의 학식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지자 마침내 그를 불러 대화를 나누게 된다.
광종이 그를 불러 대화를 해 보니 뜻이 맞았다. 이후 병이 차츰 나아지자 광종이 그 재주를 사랑하여 후주에 표를 보내 신료로 삼기를 청했다. 그래서 마침내 등용하게 된다. 쌍기는 광종의 총애를 받아 광종의 개혁 정책들을 뒷받침하는 브레인 역할을 한다.
광종이 필요성을 찾아 그를 부르는 운명과 쌍기가 중국의 혼란을 예감하고 차라리 귀화하여 고려 왕조를 돕는 일을 택한 운명이 본격적인 과거제도를 도입하는 혁명을 맞이한 것이다.

 

과연 어떤 운명 때문이었을까?

고려 4대 왕인 광종은 아버지 왕건의 위업을 바탕으로 두 형들을 꺾고 왕위에 올랐지만 고려 땅에는 여전히 왕좌를 노리는 미진이 계속되고 있었다.
통일 이후 왕조 운영을 평화롭게 도모하고 자신의 안위도 튼튼히 하려면 호족 세력들을 제압하는 것이 첫걸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합리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인재 교육과 선발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관료 등용 방식을 그냥 귀족 출신 중에서 선발했던 방식을 벗어나 과거제를 만들어 시험으로 뽑는다는 것은 가히 혁명이었다.
이런 혁명을 꿈꾸고 있을 때 그 방식을 제안한 중국인 쌍기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쌍기 왜, 무엇 때문에 고려에 남아 광종의 정치를 도우려 했을까? 쌍기가 광종의 간곡한 부탁을 받긴 받았지만 고려에 남는 것과 귀국하는 것 어느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을까?
당시 중국은 후량·후당·전촉·후촉·후주 등 5호 10국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들 왕조들에 속해 있던 지식인층들은 매우 불안해했고 어디론가 안정을 찾아 새로운 세계로의 탈출을 모색하고 있던 때였다. 후주의 정치적 상황 역시 앞날이 매우 불투명했다.
쌍기는 이런 상황에서 귀국한다고 한들 어떤 지위가 보장될지도 예측하기 어려웠고 고려의 왕인 광종이 최상의 대우와 연봉, 저택, 부인 등을 보장한다고 하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세월이 흘러 중국이 어느 국가에 통일되어 다시 호출된다 하더라도 고려에서 훌륭한 활약을 바탕으로 명성을 얻으면 귀국하게 되면 오히려 금의환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광종의 글로벌 코리아, 장성에서 실현하자

이제 대한민국은 더 이상 백의민족의 나라가 아니다. 수많은 민족이 ‘다문화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수많은 국제적 인물들이 사업가를 꿈꾸며 깃들고 있다.
농촌지역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귀농귀촌을 꿈꾸며 농촌을 찾아온다. 그들은 희망을 새 땅을 찾아오고 기존의 주인공들은 인구감소의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해가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장성도 더 이상 장성인들만의 삶터는 아니다. 지난해 800명의 귀농인이 장성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남이 아니다. 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인 필연적 운명이 됐다.
가만히 있으면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에 놓인 장성을 누가, 어떻게 살려 나갈 것인가는 스스로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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