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이 밝아오자 통곡 소리 울렸다!
기해년이 밝아오자 통곡 소리 울렸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1.09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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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권력의 칼끝이 향할 곳은 어디인가?

파도 철썩이는 한산섬에 흐린 달빛이 드리운다.

이내 짧은 탄식이 터져 나온다.

“아~, 이제 그 권력의 칼끝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한양의 조정에서는 충장공 김덕령이 난을 일으켰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그들에게는 위기의 나라를 구한 의병장도 소용없었다. 오직 권력과 금전에 눈이 어두워 그들의 이익에 배치되면 죄인이었고 그들을 위협할 만한 인물이면 역적이었다.

“다음 차례는 누구란 말인가?”

이순신은 자신이 차고 있던 구국의 큰 칼이 자신을 향한 역적의 칼로 날아오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마음은 불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왜군과의 싸움에도 대비해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 내부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칼끝을 어디로 겨누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야말로 전장의 장수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 이순신의 마음은 착잡했다.

“통제사 대감!”

이순신이 산에서 내려와 본영으로 막 들어서는 순간 호위군관인 송희립이 외쳤다.

“무슨 일인가?”

“조금 전 한양에 갔던 연락선이 돌아왔습니다. 통제사 대감께 직접 전해 달라는 서찰이 있습니다”

“그래? 알았네.”

이순신은 송희립이 건네준 서찰을 쥐고 숙소로 들어갔다.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서찰을 보낸 사람은 유성룡이었다. 서찰의 내용은 예상대로 충격적이었다.

서찰에는 최근 조정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호남의 대표 의병장 김덕령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는 것과 그 일로 김덕령을 아끼던 세자가 병상에 누웠다는 내용이었다. 편지 말미에는 조정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으니, 조심하라는 당부의 말도 담겨 있었다.

“아~”

이순신은 탄식했다.

왜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의 유능한 장수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죽은 김덕령은 이순신도 잘 아는 뛰어난 의병장이었다.

 

영웅의 전사는 남녘을 통곡의

바다로 만들고...

조선 땅을 피로 물들였던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420년 전, 무술년인 1598년 12월 16일 겨울 바다에서 벌어진 노량해전의 승전보를 올리면서 왜군이 조선땅에서 철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순신은 왜구의 총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지금 전쟁 중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긴 채.

그리고 해가 바뀌어 1599년 기해년 새해가 열리면서 한반도 남해안 고을고을의 집집마다에서 통곡소리가 울렸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서서히 알려지면서였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은 왜군을 물리쳐 백성들의 한 맺힌 가슴을 통쾌하게 뚫어주던 승전보 바로 며칠 뒤의 비보였기에 더욱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한음 이덕형의 기록을 보면 그 통곡소리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승전하던 날 식량을 운반하던 인부들도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울음을 터뜨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달려 나와 통곡하다가 서로를 위로했다”

이순신의 유해는 노량해전 근처 관음포(지금의 경남 남해군)에 가매장된 뒤 전쟁이 끝나고 한양 올라가는 길을 따라 남해에서 호남을 가로질러 충청도 아산으로 옮겨지게 된다.

 

권력의 질투로 김덕령까지

죽어 나가는데

그러자 한반도의 남녘, 남해안에서 아산에 이르는 수백리 길은 이순신과의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백성들의 통곡으로 또 한 번 가득 찬다. 가는 길목마다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와 제사를 올렸고 장례 행렬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고을 경계마다 릴레이처럼 통곡이 이어졌다.

아마도 죽지 못해 살아온 그들에게 다시 살아야겠다는 마지막 불씨를 지펴주고 떠난 그들의 영웅을 못내 혼자 보내기 서러워서였을 게다.

당시 백성들의 외침을 들어보면 사뭇 가슴이 저민다.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공은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백성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누가 그들을 도탄에 빠지게 했고 누가 그들을 살렸다는 것을...

백성들은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게 해 준 사람은 조선의 무능한 왕과 탐관오리들이 아니라 백의종군을 두 번씩이나 하고 매 맞아 죽을 뻔하면서도 지친 몸 이끌고 용기와 지혜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순신이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분노했다. 이순신 뿐 아니라 이순신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싸웠던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가를 보고서 말이다.

 

재산과 특권만을 생각하는

자들이 없기를...

그리고 백성들은 이순신 장군보다 한 해 전에 억울하게 옥사한 또 한 사람의 영웅을 떠 올렸다.

지금 호남인으로부터 충절의 상징으로 떠받들고 있는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었다. 지금도 옛 도청 앞 거리를 충장로라고 명명하여 기리고 있는 역사의 증인이다.

호남의 대표 의병장이었던 김덕령 장군은 경상도의 곽재우 의병장과 의리로 뭉친 절친이었고 합세하여 남해안에서 왜군을 물리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들은 이순신 장군과도 전쟁터에서 조우하며 조선 땅을 지켜내는 주인공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의 무공을 질투한 간신배들은 조정에서 음모를 거듭하여 이몽학의 난에 연루시켜 역적으로 몰고 끝내 고문으로 김덕령 장군을 고문 후유증인 장독으로 죽게 만들었다.

김덕령 장군이 고문 끝에 죽기 직전 선조 임금에게 남긴 “저는 충효로써 죽음은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은 실로 심금을 울린다.

당시 임금과 주류층들은 온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뒤 전쟁에 일체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쟁에서 싸워 이긴 김덕령 같은 의병장을 고문으로 죽였다.

그들에게 나라는 어찌 되든 관계없었다. 나라가 망하든 말든, 민생이 도탄에 빠지든 말든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그들의 ‘이익’이었다. ‘재산’이고 ‘특권’이었다. 그리고 나의 이익에 반대되면 없애면 그만이었다. 심지어 나라가 왜구들에게 먹힐 위급의 순간에도 그랬다.

바로 420년 전 기해년의 일이다.

그런 일이 우리 역사에 다시는 없기를 고대하며 안타까움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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