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만세 함성이 들리는가?
100년 전, 만세 함성이 들리는가?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1.23 1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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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구중궁궐 높은 단하의 신하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외친다.

“만세 만세 만만세!”

궁궐 밖의 백성들 역시 왕의 안위와 장수를 축원하며 마치 바람 앞의 들풀처럼 엎드리며 머리를 땅에 부딪친다. 절대권력에 절대충성을 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황제가 지배하는 중국에서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는 어떠했을까?

우리가 역사 이래 최고의 군주로 받들고 있는 세종 임금이 즉위하면서 아버지(태종)를 상왕으로 봉승하는 의식을 펼치는 장면을 세종실록에서 찾아보자.

“통찬(通贊·국가적인 행사 때의 사회자)이 몸을 굽혀 세 번 발을 구르고 꿇어앉아 ‘산호 천세(山呼千歲), 산호 천세’를 부르고, 다시 ‘산호 천천세’를 부른다.…많은 관원들이…꿇어앉아 ‘산호천세, 산호천세’를 부르고, 재차 ‘산호천천세’를 부른다.…”

조선에서 이뤄진 대부분의 의식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만세가 아닌 천세 또는 천천세를 외치고 있다.

만세(萬歲)와 천세(千歲)의 차이는 하늘과 땅과도 같다.

아시아에서 ‘만세’라는 칭호는 황제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칭호였다. 중국을 제외한 작은 나라에서 감히 만세를 부르다니 천자가 다스리는 황제국으로서는 불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 변방의 뭇 나라들은 숫자 일, 십, 백, 천, 만을 떠올리며 자신들의 왕을 위해 궁여지책으로 ‘만세’ 바로 밑의 ‘천세 천천세!’를 외쳤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가끔은 당찬 기세를 찾을 수 있다.

비록 한 때 아시아를 통치한 원나라의 기세에 눌려 원의 통치를 받기도 했던 고려는 내부적으로는 정통 왕조임을 자처하며 노골적으로 ‘만세’를 불렀다.

예컨대 1300년(충렬왕 26년) 원나라 정동행성이 자기 나라 황제 성종(재위 1294~1307)에게 아뢴 내용을 보자. 정동행성은 1280년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위해 고려 땅에 세운 정치간섭기구다.

“고려 국왕이 큰 모임을 열 때 곡개(曲蓋·수레 위에 받쳐 햇빛을 가리는 덮개)와 용병(龍屛·용이 그려진 병풍)을 치고, 경필(警필·임금이 행차할 때 행인을 오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발을 구르며 춤추고는 만세 부르기를 중국 조정에서 하듯 합니다. 분수에 넘침이 극에 달합니다”

정동행성은 고려가 마치 황제국처럼 행동하고 있다며 본국에 일러바치고 있다. 그러자 원나라 황제는 ‘이게 무슨 짓이냐’며 호통을 쳤다고 알려진다.

역사에서 보면 만세는 통치자나 나라의 무사태평을 가리키거나 기원하는 연호이다. 이러한 역사는 절대 왕권이 존재하는 근대까지도 계속됐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

우리 역사에서 황제라는 칭호를 당당히 사용했던 왕은 조선의 26대 왕 고종이었다.

고종은 비록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 열강 사이에서 곤혹을 겪고 신문명과 구문명의 갈등으로부터 나라를 수렁에 빠지게 만들었지만 1897년 8월에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진 자주의식이 팽배한 군주였다.

그 때부터 백성들은 거리낌 없이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1910년 합일합병으로 식민지배가 시작되자 이제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도록 강요받았다. 그 사이에서 뜻있는 백성들은 ‘그럴 수는 없다’며 ‘천황폐하 만세 거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감옥에 가거나 맞아 죽기를 각오하기도 했다.

우리말로 된 호칭 하나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서글픈 민족의 한을 곳곳에서 볼 수 잇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벅찬 장면을 그려나갈 때 반드시 필요했던 말이 바로 ‘만세’였다.

그 가운데서도 꼭 100년 전에 들려왔던 ‘대한독립 만세’는 가장 값진 소리였다.

100년 전 우리 고을에서도 들렸을 법한 그 외침 소리 ‘대한독립 만세’는 우리의 존재를 알리고 살고자 하는 몸부림의 저항이었다.

사방이 일제의 그늘에 뒤덮이고 일제의 총검이 노려보는 시대에 들려온 그 함성은 무한의 기적소리였다.

그런데 그 ‘대한독립 만세’ 외침의 대열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 그것도 모자라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다니던 자들이 더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니 서글프다.

속칭 말하는 금수저, 은수저의 대부분의 유전자가 이들 친일파들이란 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100년 전 만인이 평등한 국가를 위해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의로운 애국지사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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