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모이...사전 편찬작업이 내란죄라고?
영화 말모이...사전 편찬작업이 내란죄라고?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1.30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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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1942년 8월, 함경남도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에게 발각된다. ‘빠가야로!’를 외치던 야스다는 여학생들을 후려치며 ‘왜 한국말을 하냐’며 경찰서로 잡아간다.

일본 경찰은 취조 결과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정신을 일깨워주고 감화를 준 사람이 서울에서 한글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이라는 사실을 캐낸다. 경찰은 곧이어 정태진을 연행, 취조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변절자 정태진의 자백으로 우리말 장려운동의 실체가 드러나자 일제는 1919년 3·1운동 후 부활한 한글운동을 폐지하고, 조선민족 노예화에 방해가 되는 단체를 해산시키며 나아가 조선의 지식인들을 모두 검거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게 된다.

1942년 10월, 일제가 우리말 사전을 만든다고 조선어학회 회원들 33명을 ‘치안유지법 내란죄’를 씌워 투옥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조선어학회사건’이다.

일제는 조선어사전 편찬에 관여했던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선생 등 33인을 검거, 악랄하게 고문하고 재판에 넘긴다. 그 때 악독한 고문과 감옥살이에 두 분이 감옥에서 돌아가시고 나머지는 대부분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다. 나머지 투옥중이던 분들은 해방이 된 지 이틀 뒤인 1945년 8월 17일 석방됐다.

만약 해방을 못했다면 그분들은 영원히 감방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조선어학회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모든 학교와 관공서, 공식 회합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도록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말을 하는데 그것이 불법이라며 잡혀가는 시절을 겪게 된다.

그러나 밟아도 밟아도 다시 일어나는 들풀 같은 끈기의 민족 아니었던가?

말이 없는 설움, 말 할 수 없는 그런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우리말을 모아 민족의 연원이 되는 사전을 만들어 보고자하는 대업이 바로 ‘조선어 큰사전 편찬’ 사업이었다.

우리 한글학자들은 식민지배 아래서 극비리에 위험을 무릅쓰고 전국에 사용되는 지방사투리를 모아 분석하고 공통분모를 찾아내 표준어로 만들려는 작업을 시도한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말모이’의 주제가 된 사건 개요다.

‘말모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말이 어떤 고난을 겪으며 탄생했는지 뒤돌아보게 한다.

그 때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분들의 증언은 고문의 표상처럼 떠올려지고 있다.

“우리를 잡아다가 손으로 뺨치기, 구둣발로 차기, 쇠꼬챙이로 때리기, 물 먹이기, 비행기 태우기(달아매고 차기), 불로 지지기, 엎어놓고 매질하기, 얼굴에 먹칠하기, 사지를 버티고 개처럼 엎드리게 하기, 태질 하듯이 메어치기, 밤새도록 잠 못 자게하고 달초하기, 착고(발에 채우는)수갑 채우기, 찬 물이나 뜨거운 물을 끼얹기, 그밖에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석 달을 두고 고문을 했다”

그분들이 당한 고문을 어찌 말과 글로 다 형용하겠는가.

그 배경에는 침탈의 원죄인 일제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중국 침략을 앞에 두고 조선민족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 강화해 나갔다. 불순한 사상이 예상되는 사람을 잡아가둘 수 있게 만드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란 것을 공포하여 탄압했다.

1940년 일제는 각종 문예지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 폐간했다. 또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조선어를 못 쓰게 하여 조선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했다. 조선어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는 의도였다. 우리 말과 글을 단절시켜 민족 정신을 뿌리째 뽑아내겠다는 계획이었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 豫防拘禁令)을 공포함으로써 언제든지 독립운동가를 검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가장 끈질기게 버티며 우리 민족정신을 발휘하게 만든 지식인 집단이 있었다. 한글 운동의 총본부인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이다. 이들 한글학자들은 조선의 지식인들 거의 모두가 혹독한 일제 탄압과 회유에 변절하거나 친일할 때 끝까지 겨레 얼과 겨레말을 지키고 갈고 닦았다.

1921년 12월 3일,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어학회는 현재의 한글학회의 시초가 된 단체다. 처음의 명칭은 조선어연구회였으며, 장지영·김윤경·이윤재·이극로·최현배·이병기 등을 회원으로 하여 연구발표회와 강연회를 갖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한편, 1927년 2월부터 기관지 <한글>을 발간했다.

1921년 12월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으며 한글을 연구하고 정리 통일하는 작업을 했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1월 10일 조선어학회로 개칭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활동을 중단하였다가, 1949년 10월 2일 한글학회로 명칭을 바꾸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우리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은 <말모이>를 시작한 위대한 선인들의 덕택으로, 굴곡의 역사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말모이> 작업에 동참했던 분들에게 함흥지방재판소가 내린 판결문을 보자.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그래서 이들에게 치안유지법에 따라 내란죄를 적용한다”

그들의 입맛에 따른 잔혹한 일본식 판결이다.

그분들이 펴내고자 했던 <조선말 큰사전>은 그냥 사전이 아니라 <민족정신 수호 사전>이었다.

선인들의 업적을 기리고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영화 <말모이>를 꼭 관람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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