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간통을 고발한 두 아들을 내려치고 귀양 보내라”
“어미 간통을 고발한 두 아들을 내려치고 귀양 보내라”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2.13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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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조선시대 가장 영특한 왕의 한 사람인 영조 임금의 재위 30년인 1754년, 형조의 건의를 받은 임금의 재판이 이뤄진다. 10년 전에 발생한 살인사건을 재심해 달라는 건의였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어머니 인 씨가 간통행위를 했는데 이를 본 어린 두 자녀가 아버지 김세만에게 일러바치자 격분한 김 씨가 간통 남자의 집으로 찾아가 불을 지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인 씨가 남편에게 잘못을 비는 대신 말다툼하던 시어머니를 밀치며 욕을 하자 김 씨가 인 씨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다.

온 가족이 연루된 보기 드문 치정 살인 사건이었다.

김세만은 참형을 언도받았지만 살인 동기에 동정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 감안돼 10년째 형 집행이 미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뒤 영조는 이전과 다른 판결을 내리고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김세만을 멀리 귀양 보내도록 하여라. (어미의 간통을 고발한) 어린 두 아들은 당시는 어렸지만 이제 나이가 찼다.

두 아들에게 곤장 형벌을 내려 중노동을 가하고 멀리 귀양 보내도록 하라’

자식이 어머니의 간음을 고자질해 결국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아버지까지 죽일 뻔하게 만든 두 아들을 엄하게 처벌했다.

어머니의 간음죄도 크지만 부모 자식 간의 도리인 인륜을 해친 강상죄를 적용, 불효 죄를 엄중히 다뤄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큰 법전’이라는 뜻의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시대를 지배하는 최고의 법령으로서 지금의 헌법과 같은 위상을 지녔다.

조선 건국 이후 새로운 법령이 계속 쌓이고 그것들이 전후 모순되거나 결함이 발견될 때마다 속전을 간행해 왔는데 이런 과정이 계속되자 1460년 세조가 통일을 기해 편찬토록 지시해 24년이 걸려 만든 것이 바로 경국대전이다.

이 경국대전을 펼쳐보면 ‘조선은 형벌 없는 나라를 지향한다’는 이상향을 내세웠다.

이념은 원대했으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다.

조선은 삼강오륜의 덕목을 장려하고 그에 맞는 윤리와 질서 정립을 국가 통치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이를 법제화하기 시작했는데 이의 결정판이 바로 경국대전이었다.

지배층과 가부장적 신분제도의 확립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큰 골격부터 세세한 가정사 항목까지도 간섭했다.

예를 들면 ‘아들과 손자 아내, 첩, 노비가 부모나 가장을 고발할 경우 국가 반역죄 이외에는 교수형에 처한다’ 또는 ‘한 고을에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경우 그 고을의 등급을 낮추고 해당 지방관에게 책임을 묻는다’라고 했다.

또 ‘가난하지 않으면서 서른 살이 넘도록 시집가지 않는 딸을 둔 집안은 그 가장을 엄중히 논죄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뿐만 아니다. 조선 사회는 지배층 여성에게 과도한 윤리 덕목을 강요했다.

여성이 개가하거나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아들과 손자들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순종의 윤리를 확산시켰다.

이런 지배논리에 대해 조선의 국법을 만든 정도전은 어찌 생각했을까?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은 그의 저서 삼봉집(三峰集)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나라에서 형벌제도를 만든 까닭은 이것을 믿고 백성을 다스리고자 하는 데 있지 않다. 바른 정치를 하는 데 이것이 보완해 줄 뿐이다.

형벌의 목적은 형(刑) 없이 정치를 하는데 있다. 처벌을 하는 목적은 범죄를 예방하는 까닭일 뿐이다. 만일 내가 바라는 지극한 정치로는 형법을 둘 수는 있으나 쓰지는 않을 것이다”

법을 두는 목적을 국민의 계도함에 있다고 봤던 삼봉의 깊은 사상이 담겨있다.

정도전은 형벌을 유교 이상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방편으로 생각했다.

형벌을 둔 궁극의 목적은 형벌이 필요 없는 사회를 이루는 데 있다고 봤던 것이다.

한참 후대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율곡 이이는 법률이 안민(安民)의 도구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는 안민의 핵심정책으로 세금을 가벼이 하는 박세렴(薄稅斂)과 형벌을 신중히 하는 신형벌(愼刑罰)을 꼽았다.

율곡은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형벌을 쓰되 결국은 형벌이 필요 없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다.

오히려 사회 위계질서 유지를 위해 형벌 남용이 당연시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이라는 세종 임금도 신분 앞에서 공정심과 관대함을 잃고 있었다.

세종도 공평한 법집행이라는 ‘신형벌’ 보다는 신분 사회 유지를 위해 차별 대우가 우선적이었다.

관노(官奴) 출신으로 세종에게 발탁되어 조선 과학기술의 기반을 닦은 장영실 마저 어처구니없는 형벌 적용으로 관료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당시 장영실은 임금의 가마를 관리하는 책임자로 있었는데 마침 가마가 부서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금은 이순로, 장영실, 최효남 등의 죄(가마 부서진 사건)에 대해 황희 정승에게 아뢰게 했다.

이에 황희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이 사람들의 죄는 불경죄에 해당하니 관직을 회수하고 곤장을 때려 나머지 사람들로 하여금 거울로 삼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에 실린 세종 임금의 행실이었다.

의도한 일도 아닌 원인 모를 가마 사고가 이들의 관직을 박탈하고 고문을 가해야 할 성질이었을까?

이에 대해 장영실 등이 천민 출신이 아니라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면 그런 형벌이 내려졌을까 하는 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성군 세종대왕 때에 능지처사(陵遲處死:인간을 6부분으로 찢어 사형에 처하고 사지를 전국으로 보내 모범을 삼는 일)로 죽은 사람이 무려 60명에 이를 정도로 가장 많았다고 하니 어찌 두말이 필요할까?

자신들이 유지해야 할 지배체제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생명보다, 인간의 존엄성보다 유교적 윤리를 앞장 세웠던 조선사회의 그늘진 단면도라고 할 수 있다.

이제 21세기, 우리는 달라진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지배자의 논리가 썩은 기둥처럼 뿌리 박혀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법조계다.

대법원장이란 관직을 지냈던 양승태 사법 농단을 바라보며 ‘그들만을 위한 형벌’을 언도해왔던 비굴한 낯짝들을 다시 본다.

후대 사가들은 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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