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 최현웅 기자
  • 승인 2018.03.23 15: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귀농인구 몰려드는 인심·풍광좋은 마을
임란부터 삼일운동까지 항일 ‘의향마을’
북이면 모현1리 모현 평촌 류중원 이장
오산 창의비를 설명하고 있는 류 이장
오산창의비를 설명하고 있는 류 이장

“마을 입구 진입로가 쪼께만 더 넓어졌음 좋겄구만.”

마을 한가운데로 모현천 맑은 물이 지나고 노령천과 합해져 황룡강으로 흐르며, 호남선철도와 호남선 고속도로가 지나는 곳. 모현천을 중심으로 다리 윗마을이 모현마을이고 아랫마을이 평촌이다. 예전에는 12동네가 모여 있다고 해서 여울이 여흘이 되고 여룰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띄가 많은 곳이라 하여 모현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30여 년째 모현1리 이장을 맡고 있는 류중원(65) 이장은 젊은 시절 서울서 생활하다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데리고 고향에 내려와 정착한지 어언 40여년이 흘렀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28살 류 이장이 24살 고창처녀를 중매로 만나 첫눈에 반해 식을 올리자마자 부리나케 고향으로 내려와 부모님 모시며 살게 됐다고 한다. 24살꽃다운 새색시가 서울생활하다 15명 대식구가 사는 시골마을에 와서 농사를 지으려니 얼마나 막막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다. 그때의 미안함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류 이장은 “집사람도 시골태생이긴 하나 농사도 안지어보고 귀하게 자랐는데 나 만나 고생 많이 했어. 그런데 지금은 집사람의 손놀림이 얼마나 잰지 집사람은 날아다니는데 나는 오히려 건달”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이 마을에 살면서 남매를 낳아 모두 출가 시키고 이제는 부부만 남아 오붓하게 지내신다. 자녀를 왜 이리 적게 낳으셨냐고 물으니 당시엔 정부에서 한창 산아제한을 정부 정책차원에서 추진하던 터라 그게 좋은 줄 알았다고.

온 나라가 급속하게 줄어드는 인구 탓에 마을마저 없어질 지경이라며 아우성들이지만 40여 가구 70여 주민이 사는 이곳 모현리는 7~8년 전부터 매년 귀농인구가 몰려들고 있다. 아로니아 등 특용작물 재배로 짭짤한 수익원을 찾아낸 주민들과 귀농주민들은 류 이장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오산창의비를 모신 제각 전경
오산창의비를 모신 제각 전경

 

전통을 잇고, 주민들 화합도 다지고

10여 년 전부터는 해마다 보름이면 달집태우기나 윷놀이, 투호놀이 등의 행사를 개최해 잊혀가는 전통도 살리고 마을 주민들의 화합도 다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 때 나눠 먹는 막걸리와 떡 등 모든 음식은 마을 주민들이 함께 직접 만든다.

모현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 김경수, 김제민, 기효간, 윤진을 중심으로 장성 남문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우다 순국한 인물을 추앙키 위해 건립한 사우인 ‘오산창의비’를 간직한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비각 안에 놓여 있는 비는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 비의 특징은 비의 제목이 둘이라는 것인데, 하나는 앞면 중앙에 세로로 적힌 ‘호남어산남문창의비’이고, 다른 하나는 뒷면과 양측면 윗쪽에 가로로 새긴 ‘유명조선호남어산남문창의비’이다. 앞면에는 비 제목의 양 옆에 의병단의 중요인물 77명의 이름을 신분별로 나누어 기록하였는데 여기에는 사노비와 천민의 이름도 포함돼 있다. 조선 순조 2년(1802) 호남지역의 유림들에 의해 세운 비로, 판서 홍양호가 비문을 짓고, 황승원이 글씨를 썼다.고 알려졌다.

삼일사 전경
삼일사 전경

 

3·1운동사에도 길이 남을 장성의 독립운동

이뿐 아니다. 모현마을은 전남의 3·1운동사에서도 길이 남을 13인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사우도 있다. 삼일사는 모현리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지사 신상우, 신태식, 유상설, 신국홍, 유상학, 고용석, 유상순, 박광우, 정병모, 오상구, 신경식, 유상능, 신종식 등 13인을 제향하는 사우다.

모현리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3일(음 3월 3일) 화전놀이를 빙자하여 당산에 모여 유상설, 고용석,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유상학, 신국홍 등이 마을 사람 200여명과 모현리 일대를 돌며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헌병대가 출동하여 주모자로 유상설, 고용석, 유상학, 신경식 등을 끌고 갔다.

이에 격분한 주미들은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등이 4월 4일 주민 200여명을 앞세워 헌병대 주재소로 향해 갔다. 마침 사거리 장날이라 유상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200여명이 주재소로 몰려가 전일에 잡혀 간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다시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신국홍, 유상순, 오상구, 박광우 등을 체포 장성읍으로 옮겨 고문을 가하고 법원으로 넘겨졌다.

광주지방법원의 판결은 유상설, 고용석은 2년,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신국홍은 1년 6월, 유상학, 유상순은 1년, 오상구, 박광우를 징역 6월에 처했다. 해방이 되자 유림들의 뜻을 모아 사거리에 3·1운동의적비를 건립하고, 3·1계를 조직 3·1절에 지사들의 위령제를 지내오다 1990년에 삼일사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류 이장은 모현마을이 임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오롯이 항일정신을 간직한 의향마을임을 강조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