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장성엔 봉홧불과 만세소리 들끓었다.
1919년, 3월 장성엔 봉홧불과 만세소리 들끓었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3.06 1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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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경찰관이 체포하려고 오른손을 잡으면 왼손으로 만세를...”

화창한 봄기운이 조선 반도에 서서히 움트기 시작할 즈음 마을 사람들의 주고받는 인사가 흥에 겨웠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강가엔 버들강아지기 흐드러지게 피고, 사람들은 봄기운에 휩쓸리듯 분주히 움직였다.

음력 3월 3일, 예로부터 ‘삼짇날’이라 하여 봄 화전놀이를 즐기던 풍습을 이어가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모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마을 입구 냇가 주막집인 박승화의 집에 마을 유지들이 하나둘씩 찾아든다. 적당히 사람들이 모이자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소식을 전한다. 모현리에서 바깥세상과 접촉이 많은 젊은이들인 유상설(30세), 고용석(25세) 등이었다.

이들은 “세계적으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각자 민족이 운명을 개척하자는 새로운 기류가 찾아오고 있으며 이에 맞춰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웃 광주에서도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이 계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광주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계속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 뒤를 이어 한문 선생인 정병모(39세)가 일어서서 ‘의기(義氣)의 고장 장성에서도 온 주민이 총궐기한 독립만세운동을 펼쳐야 될 것 아니냐’고 열변을 토했다.

의기를 투합한 동네 사람들은 다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를 만들어 모이도록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 유상설, 고용석, 정병모, 신태식, 유상학, 신상우, 신국흥 등이 앞장서자 2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고 모현리 일대를 행진했다. 그러자 나머지 마을 사람들도 합세, 금세 인파가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이 같은 움직임을 감지한 면장이 즉시 일본 헌병에게 밀고하자 사거리에 주재하던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헌병들은 마을 사람들을 다그쳐 주동자 3명을 체포했다. 이 같은 사태를 당한 주민들은 그날 저녁 회합을 갖고 사거리 장날인 다음날을 기해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재결의했다. 이들은 다음날 장 보러 나온 주민들과 합세하여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전날 체포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독기를 뿜은 헌병들은 무자비하게 무력을 동원, 해산을 요구하고 주동자 8명을 추가로 체포하여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모현리 사람들은 더 강하게 저항하며 인근 지역에 장성인(長城人)의 기개를 알려나갔다. 급기야 그 투쟁은 장성 전역에 활화산처럼 번져나갔다.

4일 저녁에 삼서면, 진원면, 남면, 동화면에서 산마루에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황룡면, 삼계면, 서삼면, 북일면, 북이면, 북상면, 북하면에서 태극기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일제의 탄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격렬하게 저항해온 곳이 바로 장성이었다. 지역민들은 확고한 사상적 무장과 견고한 조직으로 대응,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동안 장성에서 대규모 시위만 하더라도 모현리 시위를 비롯, 장성읍 시위, 삼서면 소룡리 교회 시위 등 6차례가 있었다. 이 시위에 참가한 사람만도 약 1,500명이었으며 사망자가 19명, 부상자가 15명, 나머지 체포자가 15명이나 되었다.

일본 헌병사령부가 3.1운동과 관련된 전남 만세운동을 보고하는 자료에서 장성 지역의 평가를 보자.

“발생 당시 폭민(폭동을 일으킨 사람, 말하자면 애국지사)들의 심정은 자기 행동을 크게 과장하여 의기가 앙연(昂然:드높아서)하여 경찰관이 체포하려고 오른손을 잡으면 왼손을 들어 만세를 부를 정도로 열광적이었고, 경찰관이 오는 것을 보고 도주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 표현만 보더라도 장성에서의 독립운동이 얼마나 격렬하고 당당하게 펼쳐졌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헌병들은 주동자 색출을 위해 협박과 고문을 통해 기어이 찾아내고 그들에게 악랄한 고문을 더해 조서를 꾸며 재판에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광주지법의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했는데 당시 판결문에 남긴 애국지사의 항변은 우리를 숙연케 한다.

모현리 만세운동으로 구속된 신상우는 “나는 4천 년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의 한 사람이다. 각국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민족이 크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른다는 말을 듣고 한번 만세 부른 것이 무슨 죄이냐”고 당당하게 대들었다.

모현리 만세운동으로 구속된 유상설은 “나는 조선 민족 중의 한 농민으로 세상일은 잘 모른다. 민족평화회의에 따라 조선도 독립할 희망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양심이 발동하여 기쁜 마음에 잠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사실인즉 자기 나라의 독립을 축원한 것뿐인데 이것이 죄가 되느냐”고 항변했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명은 아니더라도 어느 애국지사 못지않게 당당하고 의연한 독립정신을 만천하에 펼친 장성의 자랑스런 의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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