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城人의 기상으로 만세를 외칩시다!”
“長城人의 기상으로 만세를 외칩시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4.01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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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 모현리 만세 100주년

북이면 모현리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주동자 체포에 주재소 불 지르고 만세 확산
만세운동을 일으킨 신상우 할아버지로부터 당시의 정황을 상세히 듣고 자랐다는 신호섭씨가 삼일사우를 찾아 현장을 소개했다. 아래 사진은 고종황제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1919년 3월의 풍경이다.
만세운동을 일으킨 신상우 할아버지로부터 당시의 정황을 상세히 듣고 자랐다는 신호섭씨가 삼일사우를 찾아 현장을 소개했다. 아래 사진은 고종황제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1919년 3월의 풍경이다.

 

고종 황제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은 북이면 모현리 청년 넷이서 설움에 복받쳐 황제가 계신 북향으로 4배를 하고 그 길로 한양으로 천리 먼 길을 떠났다.

신지식인이었던 고용석 씨(당시 25세)를 선봉으로 신상우(31세), 신국우(20세) 등 4명이었다.

가마득한 산골 마을인 이곳에도 고종 황제가 일제의 계략에 의해 독살(1919년 1월 21일)되고 인산일(장례식) 날인 3월 3일에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거사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또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상설, 이준 등이 만국평화회의에서 맹활약하여 대한제국이 곧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 들었다.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될 독립이 기운이 다가오고 있다. 이때 우리가 협력해야 잃었던 나라를 찾을 수 있다. 서울로 가자. 서울로...”

비장한 각오를 다진 모현리 청년들은 고종의 인산일을 앞두고 서울에 도착,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3월 3일 고종황제의 장례식을 치른 뒤 모현리로 다시 돌아왔다.

태극기와 독립운동선언문은 모현리 신상우 씨가 버선을 한 꺼풀 벗겨낸 뒤 그 속에 집어넣고 숨겨 들여왔다. 살벌한 일제의 검문에 걸리면 목숨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양을 오가는 쉽지 않았던 당시, 모현리에 도착한 이들은 전열을 정비하여 치밀한 계획으로 장성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서울에서 3월 1일 거국적인 대한독립만세운동이 있었고, 그 사실이 전국에 전파되어 3월 10일에 광주의 광주천변 부동교에서 열린 만세운동과 3월 21일 장성읍에서 열린 만세운동이 도화선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은 한밤중에 태극기를 손수 그리고, 머리띠를 준비하고, 오북의숙에서 등사기를 이용해 독립선언문을 수백장 인쇄했다.

당시 모현리는 원모현과 평촌, 화동촌, 북촌 등 마을이 있었는데 이들 4개 마을 학생들을 가르치는 오북의숙(鰲北義塾)이란 사설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신경식 씨라는 훌륭한 선각자가 설립한 것으로, 공립학교에서는 일본말과 일본 역사를 가르치고 우리말을 안 가르치기 때문에 우리말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신학문과 우리 공부를 할 수 있는 사설학교를 설립한 것이었다. 오북의숙은 지금의 모현리 삼일사우가 있는 그 자리 앞의 민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학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작고하신 변시연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학생들이었던 어르신들로부터 ‘광주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최한영 선생이 신태호 씨 집에서 하숙하며 이곳에서 수학을 가르쳤다’는 말을 들었다”는 구술이 있다.

이렇게 극비리에 준비된 거사 계획에 따라 주민들은 4월 3일(음력 3월 3일), 모현리에서 대대로 삼월삼짇날에 전해 내려오는 화전놀이를 빙자해 촛대봉으로 몰려가 ‘대한독립 만세’ 함성을 외치기 시작했다.

거사를 준비한 주동자들은 그 자리에 모인 2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에게 “이웃 광주에서도 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제야말로 우리 장성에서도 민족 독립의 목소리를 크게 외쳐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모현리 일대 모든 마을이 독립운동 만세소리로 가득했다. 이들은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플래카드 글씨를 흔들며 마을을 행진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의 사거리 주재소(지금의 파출소)에서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황급히 출동, 고용석, 유상설, 유상학, 신진식 등 4명의 주동자를 체포해갔다.

다음날, 여기에 굴하지 않고 더욱 분개한 나머지 주동자들과 마을주민 수백여 명은 더욱 거세게 애국심을 불태우며 주재소로 찾아가 주재소를 불 지르고 전날 체포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장성읍 헌병 분대에서 들이닥쳐 무자비하게 시위 군중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7명을 추가로 체포해 갔다.

당시 모현리에 살면서 만세운동을 밀고한 ㅈ 씨가 있었는데 훗날 독립운동을 한 신상우 씨의 아들인 신영식 씨가 이 집에 불을 질러 응징했다. 영식 씨는 목포 교도소에서 징역형을 살았고 결국 ㅈ 씨 집안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같은 모현리 독립운동과 주동자 관련 재판기록은 국가기록물 보존소에 남아있다. 당시 재판은 지방법원(1심), 고등법원(2심), 복심법원(대법원)의 순서로 진행됐는데 모현리 독립운동자들의 기록은 대구 복심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이뤄져 그 자료가 그대로 존치되고 있다.

노태우 정부시절 부산의 국가기록보존소에서 할아버지 신상우 씨(당시 31세, 징역 1년 6월 선고)의 기록을 찾아낸 손자 신호섭 씨(79)는 뒤늦게 노태우 대통령 시절, 정부의 권유에 따라 국가유공자를 신청하여 공로를 인정받았다.

“할아버지는 1981년 94세로 돌아가셨습니다. 큰 손주인 저를 제일 귀여워 해 주셨는데 당시 일제의 수탈에 분노했던 할아버지는 ‘나라를 잃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과 같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늘 강조했다”고 전했다.

“할아버지는 목청이 유달리 컸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만세를 외쳤을 뿐인데 그게 대명천지에 무슨 죄가 된단 말이냐? 내가 너희 나라를 빼앗는 것이냐?’라며 왜경들에게 대들었다고 들려주셨습니다”라고 생생히 기억했다.

신호섭 씨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잔인한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손톱 끝 마디가 ㄱ자로 꺾여 구부러지지가 않았습니다. 왜놈들이 대나무 꼬챙이로 손톱 밑을 찔러대며 ‘누가 만세를 주도하고 시켰는지 자금을 누가 댔는지 말하라’며 고문했지만 끝까지 불지 않았던 흔적이었던 것입니다. 또 발가락 고문으로 엄지발가락에 두 번째 발가락이 올라 타 있는 장애 현상을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나라를 잃은 것은 목숨을 잃은 것이다”

모현리 신상우 씨 손자 호섭 씨 생생한 증언

삼일사우 관리 부실과 활용 방안에 안타까움

 

모현리 애국독립운동가들의 함성이 울린 지 어느덧 만 100년.

하지만 이런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당시 주모자로 체포돼 옥고를 치른 12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삼일사우가 건립된 것이 고작이다.

그 사우 건립도 1989년 경, 함성이 울린 지 70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이다.

처음엔 동네 어르신들이 “제사라도 모셔야한다”며 십시일반으로 갹출하고 소나무를 베어 마을입구에 초라한 제각을 짓고 제사를 모셨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고령 신 씨 집안인 신태호 씨와 신호섭 씨, 그리고 버들 류 씨 집안에서 토지와 거금을 희사해 사우를 짓기 위한 기반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당시 고경주 장성군수와 전석홍 전남도지사가 지원하여 지금의 삼일사우가 건립된 것이다.

하지만 건축 30년째를 맞은 현재 이 삼일사우는 단청이 벗겨진 것은 고사하고 건물과 벽이 뒤틀리고 천정이 허물어져 먼지만 가득한 폐허처럼 변했다.

특히나 아쉬운 것이 있다.

이분들의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져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떻게 연명하고 있는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모현리 마을에서 매년 음력 3월 삼짇날 제사(올해는 4월 7일이다)를 모시고 있지만 찾아오는 후손들은 신상우 씨 후손인 신호섭 씨, 신태식 씨 후손인 신흥수 씨, 평촌리 천석꾼으로 당시 독립운동자금을 후원했던 가문의 후손으로 류중해 씨가 참석하고 있을 뿐이다.

지역사의 재조명을 위해서, 당시 장성 독립운동이 일제의 재판기록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구전과 흔적을 바탕으로 재정리하고 현장을 재정비하여 장성의 살아있는 자존심으로 가꿔야 한다는 바람이다. /백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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