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부활, 정조의 무한 믿음이 있어 가능했다
정약용의 부활, 정조의 무한 믿음이 있어 가능했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4.08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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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살 때 천자문을 다 배우고 7살짜리 시를 지었다는 꼬마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가마를 타고 해남의 외가 집에 도착한다.

꼬마는 중국에서 들어온 기이한 농사도구와 편리한 생활 물건들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신비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독특한 기술과 문물을 다룬 서책을 보며 감탄을 거듭한다.

이 꼬마의 이름은 경기도에서 태어난 정약용, 외가 집은 해남의 대부호 집안이었던 해남 윤 씨 가문이었다.

정약용은 해남 윤 씨 어머니를 두었는데 외할아버지가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제 윤두서였다. 공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였다.

정약용의 집안도 꽤나 괜찮았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이란 사람이었는데 사도세자를 옹호하다가 반대파에게 몰려 고향인 경기도 광주로 낙향했다.

그러나 훗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정재원은 화려하게 부활하여 다시 벼슬을 시작한다.

아버지의 몰락과 재기를 통해 권력의 위력을 몸소 터득하며 자란 정약용은 외가 집에서 느낀 새로운 학문의 유용성에 눈을 뜨게 된다. 훗날 실학의 대가가 된 바탕이다.

다산 정약용의 사상적 배경은 두 가지, 즉 권력의 위상과 신학문의 힘이 바탕이었다. 게다가 그가 그토록 아끼고 소중한 존재로 생각했던 백성에 대한 연민이 항상 묻어 있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은 33살에 암행어사로 임명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목격하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영조 때 권세를 부리던 관리들의 수탈과 탐욕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백성들의 삶과 탐욕스러운 지방관의 모습을 보고 암행어사 정약용은 시 한 수를 지으며 한탄했다.

"깨진 항아리는 헝겊으로 발랐고 / 선반은 새끼로 묶어 무너짐을 막았구나 / 구리 숟갈이야 오래전에 이장이 빼앗아갔고 / 무쇠솥마저 이웃집 부자가 빼앗아갔네 / 닳고 닳은 무명 이불이 오직 한 채 / 이 집에서 부부유별 논할 수도 없구나 / 아이들 저고리는 어깨가 나오도록 헤어졌고 / 이 세상 태어나 바지와 버선은 구경 못했네 / 큰아이는 다섯 살에 기병(騎兵)으로 등록되고 / 세 살 난 작은 아이는 군적(軍籍)에 올라 있어 / 두 아들 세공(歲貢)으로 오백 푼을 물고 나니 / 어서 죽기만 바라는데 옷이 다 무엇이랴..."

비참한 백성의 최후를 보는 듯하다. 어린아이까지 군적(軍籍)에 올라 세금을 내야 하는 죽기보다 더 못한 비참한 현실을 비꼰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암행어사를 지냈지만 가는 곳마다 탐욕스러운 관리들의 비위를 들춰내고 처벌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백성들의 아픈 곳을 치유해 줬다.

그러면서 정약용은 나라와 관리를 다스리는 법에는 단호했다.

“법의 적용은 마땅히 임금과 가까운 신하부터 이뤄져야 한다”고 철칙을 세워 집행했다.

당시 조선의 문예부흥을 꿈꾸던 정조 임금도 잘못된 대신들의 척결을 외치는 정약용의 의지를 높이 사며 그의 뜻대로 처리하도록 했다. 새로운 사상과 과학의 힘으로 새로운 조선을 도모하려 했던 정조의 뜻이 정약용의 사상과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정약용이 위대한 실학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실력과 노력이 있었지만 조선의 문예부흥을 갈망한 정조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정약용이 정조를 만나지 못했다면 실학을 집대성하기는커녕 조선 사회를 좀 먹는 불순한 사상을 전파한 위험인물로 낙인찍혔을 지도 모른다.

위대한 군주가 탁월한 신하를 알아주는 것일까?

간간이 올라오는 정약용을 시기질투 하는 투서와 대소신료들의 탄핵 상소에도 정조는 꿋꿋이 정약용을 지켜주었다.

그 대가로 정약용은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을 평가받는 경기도 수원의 화성을 건축했다.

화성은 정조의 명으로 정약용이 총책을 맡아 기중기 등의 건축기법을 동원 1794년 2월에 축조를 시작하여 2년 반 만인 1796년 9월에 완공됐다. 둘레가 무려 5,520m에 달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정조와 정약용은 이 화성을 완공으로 그들을 시기 질투하던 신하들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 임금의 남다른 총애와 타협을 모르는 정약용의 강직한 성품은 그에게 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다. 임금이 살아있을 때는 죽어지내던 정적들은 정조가 죽자 그동안 못다 한 한풀이 마냥 정약용을 헐뜯기 시작했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모진 박해를 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결국 정약용은 20년 가까이 강진에서 유배객으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의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그는 이 시기를 오히려 기회로 활용했다. 그는 유배지에서 경세유표 · 흠흠신서 ·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면서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했다. 인생의 암흑기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이룬 것이다.

특히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지방관의 치민(治民)에 대한 도리를 기술하고 있다. 비록 짧은 경험이었지만 암행어사로서, 그리고 지방 수령으로서 백성들의 실상을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이 시대 진정한 정치가의 상을 세우고 싶었다.

백성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그들에게 자유와 행복이 오도록 노력한 다산 정약용. 역사의 주체가 바로 민중이며, 민중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한 그는 몇 백 년을 앞서간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죄인으로 유배를 당했던 정약용이 더욱 돋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뒷면에 있다.

만약 정약용이 중앙관료와 궁중의 잘못된 법도를 지적하고 계도했다면 어떠했을까?

든든한 후견인이었던 정조가 사라진 마당에서는 정약용이 아무리 탁월한 식견을 내놓더라도 기득권 세력들이 가만히 놔 둘리 없었을 것이다.

중앙의 잘못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짖어 대 봤자 아무 소용없고 화살만 돌아오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지방관의 계도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약 유배당한 정약용이 한탄 섞인 목소리로 중앙정치를 비판했다면 우리가 그토록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는 <목민심서>를 비롯한 그의 주옥같은 저서들은 한권도 빛을 못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백형모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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