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면 용정리 신 씨 집안 ‘두 형제 아픈 사연’
동화면 용정리 신 씨 집안 ‘두 형제 아픈 사연’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4.15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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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 노역...진폐증으로 평생 고통에 시달리다”
해방 뒤 어선 하나로 현해탄 건너 장성에 도착

임시정부수립 100년, 해방된 지 74년이 흘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아픈 흔적은 곳곳에 여전하다.

일본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한 광주·전남지역 일제 노무동원 피해자 집단소송인을 신청을 지난 5일 마감한 결과 총 537건이 접수됐다.

소송을 진행하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광주전남지부는 앞으로 가해 기업 특정 등 본격적인 소송 준비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마감된 소송 희망자 가운데 장성 출신의 징용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눈길을 끌었다. 조국을 잃은 청년들의 한 많은 이국 생활은 소설보다 더 진한 피눈물을 돋게 했다. 그들의 사연을 찾아가 본다.

-편집자 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집단소송 537건 접수

장성 출신 일제 징용인 한 많은 사연 눈길

선친 신휘경 씨 사진앞에서 눈물짓는 신극주 씨
선친 신휘경 씨 사진앞에서 눈물짓는 신극주 씨

한때는 떵떵거리고 잘 살았던 부잣집이었다.

장성군 동화면 용정리 가정 부락은 예로부터 신(辛) 씨들이 모여 사는 자작일촌 마을이었다.

특히 신봉규 어르신네 집안은 ‘마을로 들어 갈려면 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못 들어간다’고 할 정도로 많은 토지를 갖고 있는 3백석 부자였다. 신봉규 씨는 두 아들 휘경(1915년 생)과 휘중(1918년 생)을 두었고 손자로는 극주 씨(1933년 생, 동화면 출생, 전 교장, 현재 광주 거주)를 두었다.

신 씨 집안은 일제 침탈이 노골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에게 군자금을 몰래 조달하고 3.1운동 이후에는 독립운동 단체에 뒷바라지를 하는 등 민족정신을 잃지 않았다.

조선의 식민정책을 강화하던 일제는 의식있는 지방 토호들을 대상으로 찍어내기를 시도한다.

일제가 식민수탈정책을 못 사는 서민들에게 정당성을 보장받고, 수탈한 토지나 수확물을 식민수단으로 가로채려는 최고의 전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신 씨 집안은 일제의 수탈 대상이 된데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일제 강점기,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으로 분리돼 집안이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군청에 공무원으로 다니던 큰 아들 신휘경 씨가 1943년 경, 일제에 의해 무단 해고 된다. 그러자 일정한 직업이 없이 빈둥거리던 조선의 젊은이들을 노무자로 보내려는 일제의 징용정책에 휘말려 휘경 씨는 1944년 6월 경, 일본 후쿠오카 메이지광업의 히라야마광업소에 끌려간다.

비극은 이렇게 계획적으로 시작됐다.

일제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이 패색이 짙어가면서 마지막 독기를 뿜던 시기에 이역말리 타국에 끌려간 그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휘경 씨는 나이 18세에 이미 결혼, 아들을 둔 아빠였지만 일제의 동원령에 의해 끌려간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히라야마광업소는 엄청나게 큰 광업소였지만 시설이나 장비는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곡괭이를 들고 지하로 내려가는 구조였다. 가장 두려웠던 진폐증에 대한 안전장비 하나 없었다. 수백명에 달하던 조선인 징용노동자는 개만도 못한 처지였다.

게다가 일제는 한국인 친일분자를 감독관으로 앉혀놓고 이간질을 시키며 서로 감시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잘못이 발각되면 어떤 처벌도 감수해야만 했다. 고문을 당하는 것은 고사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노무비를 삭감하는 비열한 방법을 사용했다.

말 못한 시련의 시간을 보낸 지 얼마나 됐을까?

1945년 8월 15일, 히로히또 천황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은 컴컴한 탄광 지하에서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의 해방이 이뤄진 것이다.

수백 명의 조선 징용자들은 8월 16일부터 자유의 몸이 됐다. 하지만 돌아가야 할 고향은 현해탄 건너 멀고 먼 조선 땅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든지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모아 몇몇이서 방법을 찾아 나섰다.

조금씩 돈을 모아 조선까지 갈 수 있는 중형급 어선을 빌리기로 했다. 약 30명이 동참했다. 어선으로 현해탄을 건넌다는 것은 죽음을 맞서야 하는 것이었다. 망망대해, 작은 어선 안에서 멀미를 참아가며 같이 먹고 같이 싸고, 같이 부여잡고 죽음의 현해탄을 건넜다. 대마도에서 잠시 식수를 보충하고 멀미와 복통을 진정해가며 서쪽 부산항을 향했다. 조국을 잃은 처참한 신세를 탓하며 살아남기 위한 모진 운명을 감수한 그들은 5일 동안의 항해를 거쳐 마침내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전라도로 가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휴게시설이 제대로 갖춰질 리 없는 부산역 플랫폼에는 몇날 며칠을 기다리던 귀국 징용인들이 쏟아낸 오물이며 대변들이 질퍽해 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부산역을 출발, 대전을 거쳐 호남선을 타고 장성역에 내림으로써 한 많은 징용자의 설움이 막을 내린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가족의 품에 안긴 휘경 씨는 12살 짜리 아들 극주를 품으며 살아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그렇지만 돌아왔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수백 미터 지하 탄광 막장에서 그대로 분진과 석탄가루를 마신 탓에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조국은 해방이 되었으나 몸은 진폐증의 고통에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했다.

진폐증은 폐에 미세한 석탄가루가 쌓여 생긴 증상으로 지독한 기침과 함께 검은 가래가 섞여 나오는데 세월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병이다. 당시 의학이 미개한 시대라 뚜렷한 처방 방법이 없어 진폐증 환자는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휘경 씨는 진폐증에다 합병증으로 당뇨까지 가세해 49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고통에 신음하시는 아버님에게 통증을 완화시키는 주사한대 놔 드리지 못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집안이 엉망인데다 아들인 저마저 무직 상태라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효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비극이었습니다”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며 회고하는 신극주 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교직에 몸을 담았으나 이리저리 이사 다니면서 선친의 유품을 망실했다는 극주씨는 마지막 남은 선친의 소학교 기념 사진을 닳지 않도록 코팅하여 쓸어내리고 닦고를 거듭할 뿐이었다.

동화면 신 씨 집안의 비극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형 신휘경 씨보다 동생 신휘중 씨는 2년 전인 1942년에 일제에 의해 징용되어 일본말을 배웠던 탓에 인도네시아와 태국으로 끌려가 일본의 군무원(포로 감시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하자 휘중 씨는 하루 아침에 거꾸로 그들의 포로가 돼버렸다. 태국인들의 눈에는 같은 일본인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일본인들은 한국인 군무원을 제대로 챙겨줄리 만무했다.

결국 일본으로 귀국선을 탄 휘중 씨는 해방이 되고나서도 3년 뒤인 1948년 장성으로 돌아온다. 나라 없는 조국을 떠난 지 6년 만에 장성 땅을 밟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6.25가 앞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일제를 피해 살아왔지만 사상과 이념 대결의 모순이 얽혀 서로를 죽이는 비극의 장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휘중 씨가 결혼하여 겨우 2년을 보내고 있던 시기에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북한군은 밀물처럼 내려와 7월 20일 경 장성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러면서 퇴각하는 군인들에 의한 장성군 북하면 남창계곡 보도연맹 집단 학살 사건이 발생, 100여 명이 사망하는 비극적 사건에서 휘중 씨도 휩쓸려 안타까운 생을 마감한다.

나라 잃은 설움으로 이역만리 왜놈 땅에서 고통 받은 것도 모자란 듯이 사상 갈등으로 희생된 삶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그대로 들춰내고 있다. /백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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