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가 대통령을 했다면??
안창호가 대통령을 했다면??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4.15 14: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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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위해 대통령 자리를 거절한 안창호...
서로 헐뜯고 비난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오늘...

“오늘은 가장 신성한 날이요,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다. 이날은 한두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요 이천만이 만들었고, 소리로만 만든 것이 아니요 순결한 남녀의 피로 만든 날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조선독립의 기치를 드높인 3.1운동을 두고 남긴 말이다.

안창호 선생이 그냥 교훈으로 남긴 말이 아니라 피와 눈물로 새긴 말이다.

도산은 임시정부 초대 내무총장과 국무총리로 지명돼 사실상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오직 조선의 독립만을 꿈꿨던 도산은 임시정부 최고 자리인 대통령을 잠시 제안받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나는 잠시라도 대통령 대리라는 자리에 앉아서는 몸이 떨려서 시무할 수가 없소.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려 왔을 뿐입니다”

조국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겠지만 통치하는 자리에 앉기를 끝내 거부한다.

우리는 이런 애국지사를 위인이라 부르고 싶다.

아마도 5천 년 역사에서 찾기 어려운 위인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어느 부족, 어느 국가든, 혹은 어떤 조직 사회든 최고 수장의 자리에 대한 집착은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말이다.

역사를 되짚어 보자.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남짓 흐른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100년 전 오늘이다.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침탈 야욕으로 피투성이가 된 나라와 민족을 되찾고자 이국 땅 거친 황야에서 임시정부를 만들고 군사훈련을 하며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암살하는 등 험난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공로와 역할에 대해 보이지 않는 갈등이 수시로 빚어졌고 서북파(평안도 출신들)와 기호파(서울.충청도 출신들)로 나뉘어 반목하는 일들이 많았다.

심지어 ‘저쪽 사람들에 의해 독립이 될 바에는 차라리 독립이 안 되는 게 낫다’고 할 정도로 반목이 심했다. 일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도산 안창호에 대해 ‘저 음험한 평안도 서북파 놈’이란 소리까지 나돌았다.

도산은 갖은 악담으로 이쪽저쪽에서 뒤통수를 맞으면서도 이를 갈며 참았다. 그리고 이렇게 절규했다.

“아니다. 우리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악평하고 중상하는 것이다. 더욱더 애정으로 대우하도록 노력해야한다”

훗날 도산의 이 같은 행동을 본 춘원 이광수는 이렇게 증언했다.

“선생께서 우시는 것은 보았으나 결코 노여워하시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이 같은 분파와 갈등의 진흙 밭에서 빠져나와 오직 조선의 독립만을 외치며 임시 대통령 자리를 거절한 도산 안창호의 기개는 역사의 귀감이 될 만하다. 도산은 무슨 파, 무슨 파를 떠나 서로 반목하는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달래며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일을 자처했다. 독립운동의 손과 발이 되고자 했지 머리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산이 만약 사적인 욕망을 따라 대통령의 자리에 앉았다면 그 이후가 어찌 됐을지 궁금치 않을 수 없다.

그 뒤 일제가 패망하자 광복의 꿈을 안고 귀국하려던 애국지사들은 2차 세계대전 승자인 미국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온다. 임시정부도 없어졌고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없었다.

한반도에 해방이 찾아왔으나 나라는 또다시 두 쪽으로 나뉘어 서로 간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그런 와중에서도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독립운동조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편 가르기와 분파질의 극단을 드러냈다.

북한은 임시정부에 대해 ‘분파 대립에 찌들고 독립자금을 탕진하고 강대국에 구걸외교를 펼친 반인민적인 정부’라고 혹평하며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남한은 미군정의 남한 지배 전략에 따라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승만을 신임하며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미국의 뜻대로 이승만이 초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됐다.

그 사이 조선의 독립과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던 백범 김구와 독립운동가들은 철저하게 외면당하며 역사의 뒤 페이지로 사라져 갔다.

우리 역사에는 이렇게 똑똑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손과 발이 아니라 머리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상대를 인정하기보다 저만 잘났다고 생각한다. 싸움질이 갈수록 심해지고 끝내 원수가 된다.

1,500년 전 삼국시대에도, 100년 전 독립운동 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둘러싸고 뿐만 아니라 지역의 작은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다시 돌아오신다면 어찌 뵐 면목이 있을까 두렵다.

/백형모 편집국장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윗줄 왼쪽부터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윗줄 왼쪽부터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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