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 초록은 동색이다? - 임춘임
편집국에서 // 초록은 동색이다? - 임춘임
  • 임춘임 기자
  • 승인 2019.05.13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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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풀색은 풀색이고 녹색은 녹색이다. ‘풀색과 녹색이 같다’라는 것은 비슷한 것들을 하나로 묶어 보는 비유적인 말이다. 분명 풀색은 모두 초록이 아님을 사실에서 얻어낼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시를 쓰고, 수필을 쓰고, 소설을 쓰고, 사설을 쓰고, 신문 기사를 쓰는 이러한 일들을 모두 ‘글을 쓴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분명 그 맛과 색이 다름을 우리는 잘 안다.

사람의 생각이, 그리고 편린된 생각들이 착각과 착오와 실수를 불러 온다. ‘설마’라는 안일함이 더 큰 우려를 낳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확인하면서도 또 그런 과오에 접어드는 것이 어쩌면 일상인지도 모르겠다.

고향 장성을 사랑하고, 삶의 모든 것들을 시로 노래하던 시인이, 사랑하는 내 고장의 아름다운 사연들을 시처럼 엮어 많은 독자들 가슴에 안겨주겠다는 ‘초록은 동색이다’ 관념에 빠져 ‘기사’를 쓰는 동안 ‘시’는 어느 사이 ‘시’가 아닌 ‘글’이 되어 버렸다.

(사)한국문인협회 장성지부 회장이 되고, 회원들의 작품을 마주하고 장르를 간추리고 평을 하면서 ‘초록은 동색’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풀은 풀이고 녹색은 녹색이라는 명제를 회원들의 작품 세상에서 느끼고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직업이 ‘시인’이라고들 한다. 이를 배신하고 ‘글’을 쓴다는 이유로 직업을 택했다. 그 사이 ‘시’는 퇴색되어 가고 ‘문학’은 멀어져 남이 되고 ‘생활’만이 남아 맴 도는 현실을 느껴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날마다 현실 속을 누비며 글을 쓰는 ‘기자’라는 직업군은 같은 글을 쓰지만 더 많은 책임감과 더 큰 확인 정신을 요구한다는 것도 절실히 느꼈다. 치열한 현실성도 느꼈다. 긴밀하리라 여겼던 문학성은 실종될 수 밖에 없었다. 현실을 전달하는 글을 쓰면서 나의 감성을 담아내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흔히 하는 말로 어지간히 하면서, 어물정 넘기려는 마음가짐이라면 아예 ‘현실’을 접는 게 훨씬 바른 자세였다. 나에게나 남에게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6개월이지만 차라리 빨리 내가 설 자리를 알게 해 준 장성문인협회 회원들의 감성에 감사드린다.

“동지, 동지가 가야할 길은 이쪽이 아니요?”라는 문학 동지들의 질책이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이런 동지들의 목소리를 뒤늦게 깨달은 죄에 양해를 구한다.

이제부터 내 앞에 다시 붙여질 ‘시인’이라는 호칭은 나의 삶을 훨씬 윤택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위안한다.

오늘도 새는 여전히 새벽부터 지저귄다. 저들도 각자의 목소리가 다르다. 새들이 내는 모든 소리를 ‘새 소리’로 치부하지 말고 ‘참새’ ‘까치’ 등등의 이름을 붙여 ‘청아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저 새는 참새’라고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

‘초록은 동색’이 아니고 각자의 색이 몫이 있다는 ‘내가 갈 길’을 찾는 5월이 되어 참 좋다.

신문에 올리는 사실을 담은 기사보다, 아직은 살아 움직이는 시인의 감성으로 더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을 그려 보는 시인으로 살고 싶다.

가난한 시인이라 했지만, 그 가난함 속에 더 큰 사랑과 빛이 세상에 공존하는, 제 빛을 전달하는 ‘시인’으로 남겠다.

장성을 사랑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따뜻한 감성을 주어, 의미 있는 사회가 되기를 숙원하면서 접어들었던 ‘기자의 길’을 떠나며 변변치 않은 변명을 길게 늘어놔 본다.

‘초록은 동색’이 아니 듯 ‘글’ 또한 제 색이 다르다는 것을 선물로 받은 아침, 차라리 가난해서 행복하다. 주어진 규약에서 벗어나 ‘시인’의 자유로움이 나를 더 밝게 웃을 수 있게 한다.

똑같은 아침이지만 결코 똑같지 않는 자유로운 아침이다.

/ 임춘임 문인협회장성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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