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 필암서원, 하서의 인연이 세계문화유산 만들었다.
편집국에서 // 필암서원, 하서의 인연이 세계문화유산 만들었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5.20 1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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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신동, 천하 문장(長城神童 天下文章)이라.

이 엄청난 표현은 과연 누구를 말할까?

장성의 신동이며, 그리고 천하문장이라. 한마디로 재능분야에 있어서 신의 경지를 이르는 말로서 극존칭이라 할 수 있다.

이 표현의 주인공은 예상했겠지만 하서 김인후 선생이시다.

하서 선생(1510~1560)은 인종이 세자 시절, 스승으로 가르침을 주었던 왕의 사부였다. 전라도 장성 출신의 인물이 왕의 스승이 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전라도의 자존심이요, 가문의 위상을 말해주는 일이다. 훗날에는 조선 성리학의 맥을 잇는 중심인물로 자리 잡는다.

그 무렵 성리학의 계보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김안국-김인후로 이어지는 수순을 밟는다.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는 학문과 사상의 굵은 계보를 이루는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하서는 어릴 적 학문의 연원에서부터 많은 인맥들이 등장한다.

하서가 8살 때 조광조의 숙부 조원기가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하서를 보고 시를 짓게 했는데 그 뛰어난 재주와 글 솜씨를 보고 ‘장성신동 천하문장’이라고 칭찬했다.

하서가 9살 때, 기대승의 숙부이자 조광조와 가깝게 교우한 기준(1492~1521)은 시골에 내려왔다가 그 영특함을 보고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마땅히 우리 세자의 신하가 될 인물이로다”라고 했다.

하서는 10살 때 전라도관찰사로 있던 김안국을 찾아뵙고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그를 기특이 여겨 ‘나의 소우(小友)’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서는 그때 김안국으로부터 학문다운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그해 겨울, 어린 신동에게 경천동지할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는 기묘사화다. 1519년(중종 14) 11월,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파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림파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하서는 얼마 전에 뵈었던 기준 선생이 귀양가서 사사되고, 스승인 김안국이 파직되어 이천으로 내 쫓기는 신세를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다.

왕과 궁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소옹돌이에서 어찌할 것인가?

하서의 나이 13세에 그는 스스로 ‘시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가 없으리라’(不學詩無以立)이란 선인들의 말을 따라 시경을 천번이나 탐독하게 된다.

그 뒤 17살에는 한양에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하던 담양 출신 면앙정 송순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고 문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18살에는 기묘사화를 만나 화순 동복에 유배중이던 신재 최산두를 찾아가 학문을 강론했으며 나주목사로 좌천됐다가 병으로 고향 광주 서창에 돌아와 있던 눌재 박상을 찾아 뵙고 학문의 폭을 넓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1528년(중종 23) 그의 나이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하고, 1531년(중종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됐는데, 이 때 32세의 퇴계 이황을 극적으로 만나 더불어 강학하게 된다.

당시 200여명의 성균관 유생들은 어지러운 시대상황을 반영하듯 학문보다는 시간 보내기에 급급했다. 연산조에서 두 번의 사화를 겪고 중종반정으로 살아나다가 또다시 기묘사화로 정국이 피바람 이는 회오리에 묻히는 상황이라 학문을 꺼리고 놀기를 일삼고 있었다.

그런 학풍에 환멸을 느낀 이황은 ‘날마다 공당에서 실컷 잘도 노는구나...’라는 시를 남기고 1533년 (중종 28년)에 귀향하는데 하서는 이황의 낙향을 아쉬워하여 증별시(贈別詩)를 지어 송별했다. 후일 퇴계는 '성균관에서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었다'고 돈독한 관계를 술회했다.

퇴계는 낙향 뒤 곧바로 귀경하여 1534년(중종 29년) 문과에 급제, 승정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 1539년 (중종 34년) 홍문관 수찬이 되고, 이후 바로 사가독서에 들어갔으며 1540년 홍문관 교리로 승진한다.  

이같은 인연을 맺고 있던 하서는 31살인 1540년 (중종 3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32살에 이황과 다시 교유하면서 그가 바라던 성리학 이론과 왕도정치의 이른을 펼치기에 한발 다가선다.

그리고 본격 출사한 지 3년 째, 중종 38년(1543년)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 說書)로 승진한다. 설서는 비록 정 7품의 낮은 직위이지만 장차 왕위에 오를 세자를 교육하는 막중한 업무의 자리다.

인종은 스승인 하서에게 친필 묵죽도를 하사할 만큼 존경하고 아꼈다. 지금의 필암서원 경장각은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를 보관하던 장소이다. 하지만 인종은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병사하는데 하서의 위상도 거기까지였다. 벼슬을 그만 둔 하서는 고향에 돌아와 학문 정진과 후학양성에 진력하는데 그간에 남긴 1,600여수의 시가 하서의 위대함을 엿보게 한다.

훗날 정조는 “학문과 절의와 문장에 있어서 이를 다 갖춘 인물은 김인후 한 사람 뿐이다”라고 그를 칭송했다.

이렇게 하여 맺어진 인연은 결국 오늘날 필암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인연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서의 가르침을 받은 세자는 인종대왕이 되는데, 이때 세자가 손수 그린 묵죽(墨竹)을 하사하며 화축(畵軸)에 시를 짓게 하였는데, 인종대왕과 하서의 흔적이 살아있는 당시의 묵죽도가 필암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 때문에 사액서원(賜額書院: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이 된다.

이는 곧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철폐령을 내릴 때 ‘임금의 유흔이나 유적을 갖고 있거나 직접 임금이 사액서원으로 인정한 곳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정리하라’는 왕명에도 필암서원이 폐철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인연은 또다른 인연을 낳고 세월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좁쌀 한 톨의 인연도, 털 끝 만한 인연도 소중한 이유가 아닐까.

/편집국장 백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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