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 영화 '기생충' 의 외침 "같이 살면 안될까요?"
편집국에서 - 영화 '기생충' 의 외침 "같이 살면 안될까요?"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6.17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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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없어야할 인생, 불필요한 인생을 일컬어 ‘버러지 같은 인간’이라고 부른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기생충 같은 인간’이다.

그 상징성처럼 최근 영화 ‘기생충’이 대박을 터트리고 있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아서가 아니고,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어서도 아니고, 송강호가 주연을 맡아서도 아니다.

이 영화가 존중받는 이유는 우리가 처한, 가장 한국적인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뭔가 찡한 감동’ 때문이다.

필자가 ‘기생충’을 본 느낌은 한마디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참 씁쓸한 영화’라는 것이다. 차이가 나도 너무 크게 차이나는 빈부의 격차를 실감하며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영화의 바탕이 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각’ 설정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는 기본이다. 영화가 극적 요소를 가지자면 더 극한 상황, 즉 완벽한 백수 가정과 초호화 부유층 가정의 상반성이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기택이네(송강호) 네 가족이 등장한다.

그들의 집터는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는 반지하 구조다. 영화 속에서 나오는 장맛비에 가구가 다 쓸려가고 화장실 변기에 오물이 거꾸로 솟아오르는 ‘하늘의 도움이 필요한 서민’ 가족이다.

이들 가족은 풀릴 듯 말 듯 하면서도 안 풀린 채 살아간다. 그러다가 백수였던 아들 기우(최우식)가 부잣집 고액 과외를 시작하면서 붙어 살기위한 기생충 생활이 시작된다.

아들이 과외 교사로 취직하면서 딸도 미술가정교사로 들어오고, 이들은 합작으로 모함하여 기존 운전기사를 해고시키고 백수 아빠를 운전기사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가정부로 취업시켜 기생충 가족의 생활이 시작된다.

돈이 있는 사람들이 사람을 채용할 때 보여주는 한결같은 행동방식은 ‘조금이라도 확실한, 충실한 심부름꾼’을 쓴다는 점이다.

잘 나가는 글로벌 기업 경영인인 박 사장(이선균)의 사모인 연교(조여정)는 십여 년을 가정부로 일해 온 가사도우미를 묻지도 않고 눈 앞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판단, 일시에 해고한다. 그러면서 후임자를 고를 때 “나는 사람을 못믿어요. 확실한 사람 아니면 안쓴다는 것 알죠?”라고 반문하며 운전기사인 송강호로부터 가사도우미를 소개 받는다. 송강호의 부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가진 자들의 순진함과 교만함이 함께 묻어난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그런 교만 속에 속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렇게 가난한 자들의 행복이 잠시 펼쳐진다. 남의 집에 빌 붙어사는 인생이지만 일할 수만 있다면 행복은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들아, 역시 너는 계획이 있는 놈이었구나”

아버지 송강호가 온 가족 취직의 단초를 제공한 과외교사 아들을 두고 감격스러워 던진 말이다.

“우리 네 식구가 함께 협력해서 돈 많은 박 사장 집에 취직했다는 것 아니냐. 대단한 일이야. 우리가 매달 이 집에서 벌어오는 돈이 얼마냐. 하하하”

아버지로서 가족들이 대견스러워 던진 이 말은 살벌한 자본주의 구조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방식을 찾으면 될 수 있다는 소리로 들린다.

코믹한 장면이지만 취업난에 아우성인 흙수저 가정에도 이렇게 웃음꽃이 필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마침 주인 가족이 여행으로 집을 비우게 되자 기택이네 가족은 주인 떠난 호화저택에 모여 파티를 즐긴다. 아슬아슬하지만 ‘짜릿함’을 선물해 준다. 언제 이런 때가 오겠느냐, 즐겨보자며 넓은 거실에서 잔디 정원을 바라보며 네 가족이 술과 고기로 파티를 즐기는 장면은 눈물 날 뻔한 ‘슬픈 행복’이었다.

왜 그럴까?

회사를 운영하는 박 사장이 남긴 한마디가 그 경계선을 시사한다.

“나는 선을 넘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선을 넘을까말까 한단 말이지~”

사실 흙수저에게는 온 가족이 모여 근사한 파티나 해외 여행을 꿈꾼다는 것이 어렵다. 어려운 흙수저들에게 찾아온 행운의 기회, 하지만 주인 집에서 이런 행사를 벌인다는 것이 마치 날선 칼날 위에서 추는 불춤 같은 숨막힘을 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흙수저들 사이에 물고 물어뜯는, 또 하나의 지하실 가족을 등장시켜 스릴감을 던져준다.

컴컴한 지하실에서 숨어살던 가족과 반지하 출신의 흙수저 가족이 서로의 약점을 찍은 동영상을 무기로,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가는 장면은 인간에도 동물 못지않는 비정한 세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지하 세계에서 끼리끼리도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치명적인 약점은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세상이다. 그것은 동물의 세계나 인간 세계나 마찬가지다. 다만 인간에게는 먹힌다는 의미가 빈부의 차이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다.

부도덕과 불법 등이다.

선을 넘는 사람들은 때로는 쾌락에 다가서거나 때로는 일확천금을 쥐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일들은 상대에게 큰 피해를 주거나 본인들의 인생을 파멸로 이끈다. 걸리면 철창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선을 넘는 일은 발각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아닌 영화에서는 코믹하게 끝나지만 우리는 무수히 넘지 말아야할 경계선들을 대하며 산다.

경계선을 넘느냐 안 넘느냐의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여기에 도덕과 부도덕, 합법과 불법의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여려 경계의 구분 중에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경계는 한 끗 차이다. 누구든 서로 넘나들 수 있는 구역이다. 언제든지 역전이 가능하다.

초호화 저택에서도 불행이 상존하며, 반지하 셋방에서도 행복이 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우리 함께 잘 살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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