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 6월, 이한열과 최루탄의 눈물을 잊지 말자
사 설 // 6월, 이한열과 최루탄의 눈물을 잊지 말자
  • 장성투데이
  • 승인 2019.06.1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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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최루탄 가스가 거리 골목골목까지 스며들던 32년 전으로 들어가 보자.

때는 1987년이다. 2년 전 영화로 선보인 ‘1987’의 진상이다.

전두환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해 1월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화의 열망을 안고 뛰쳐나온 한 학생이 경찰에 붙잡혔다. 그 학생은 경찰서 취조실에서 조사가 시작된 지 30분 만에 사망했다.

경찰은 사망원인을 밝히면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갑자기 ‘억’ 하고 쓰러졌다⌟

이같은 사망 원인 설명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라고 흥분했다.

그로부터 약 5개월 뒤인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 군이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다. 그는 곧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7월 5일 사망한다.

당시 연세대 정문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의식을 잃은 채 축 늘어진 학생을 동료가 부축하던 사진 장면이 로이터 통신에 의해 외신을 타면서 한국의 민주화 열기가 전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한열 최루탄 사망 사건으로 인해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에게 더욱 깊은 불신감을 주었고, 이에 분노한 국민들의 항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이어 전국 33개 도시에서 하루 100만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전두환 정권은 시국 수습을 위해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었던 노태우로 하여금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을 발표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6·29선언이다.

이로 말미암아 5.16 군사정변으로부터 시작된 27년 군부 독재는 끝나고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의 군부독재에 맞서 전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민주화 운동을 ‘6월 항쟁’이라 부른다.

6월 항쟁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정안은 지금까지도 1987년 체제라고 표현될 정도로 한국 정치,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로부터 32년이 흐른 지금 위대한 ‘시민의 힘’(People's Power)을 보여준 이한열 열사를 기리기 위한 특별 행사가 열려 주목을 받고 있다.

이한열 열사의 모교인 진흥고 학생들과 인근 지역인 신창동 주민들이 광산구 마을학교 지원사업으로 6월 15일 모교 교정에서 ‘1987 이한열을 찾아라’ 행사를 추진해 관심을 끌었다.

영화 관람으로부터 시작, 영화 ‘1987’ 속에서 이한열 군 찾기를 비롯해 사진전, 판화로 되돌아보는 항쟁의 기억전을 열었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광주 열사 이한열을 잊지 말자는 부탁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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