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 혁명을 꿈꾸던 허균 . . . 홍길동이를 어디 보냈을까?
편집국에서 - 혁명을 꿈꾸던 허균 . . . 홍길동이를 어디 보냈을까?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7.01 1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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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세종 때 한 재상이 있었다. 성은 홍이요 이름은 모(某)라. 대대로 명문거족으로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물망이 조야에 으뜸이고 충효가 겸비하기로 이름이 일국에 떨쳤다.

일찍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맏아들의 이름은 인형(仁衡)으로 정실부인 유씨의 소생이요, 둘째 아들은 길동(吉童)으로 시비 춘생의 소생이었다”

이 글은 우리 장성의 실존인물로 알려진 소설 ‘홍길동전’의 첫머리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허균이 쓴 최초의 한글 소설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허균은 한글 소설만을 쓴 게 아니라 실은 한문 소설의 대가였다. 그런데 서자 출신, 당시 흙수저에 해당하는 홍길동전 이야기를 굳이 왜 한글로 썼을까?

허균이 시대 개혁에 앞장서고 혁명 사상을 가진 인물이란 것이 바로 소설 속에 나타난다.

“공이 그 말을 짐작하나 책망한다.

‘네 무슨 말인고?’

길동이 재배하고,

‘소인이 평생 설운 바는, 대감 정기로 태어나, 당당하온 남자 되었사오매, 부생모육지은(父生母育之恩)이 깊거늘, 그 부친을 부친이라 못 하옵고 그 형을 형이라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내용인즉, 소설 속 길동이는 총명한 아이였으나 같은 아버지의 정기로 태어났지만 계집종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시대적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허균은 이런 시대적 병폐를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허균은 서자나 상민이 아니고 사대부 명문가의 자제였다.

그의 아버지 허엽은 문과에 급제하고 동부승지와 삼척부사 등을 역임했다. 허균의 형 허성은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고 명문장가 허난설헌은 허균의 누나였다.

그런 허균이 왜 무엇 때문에 서자를 옹호하는 혁명 사상에 물들었을까?

아마 두 가지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나는 그의 스승인 손곡 이달(李達)로부터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이달은 한문장 실력이 뛰어나 옥봉 백광훈, 고죽 최경창과 함께 조선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리고 허균의 형 허봉과는 친구였으며 누나인 허난설헌의 스승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달은 양반 아버지와 관기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다. 어머니가 관청에 소속된 기생이니 아무리 친분이 있고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달은 출세가 불가능했다.

허균은 이러한 스승의 삶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훌륭한 자질을 가진 스승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잘못된 세상의 폐단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적서차별은 반드시 깨뜨려야할 제도적 악습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를 보자.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과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문과급제 후 3년간의 사가독서(오늘날의 고위직 유급휴가) 기간을 거쳐 사헌부 장령이라는 중책을 맡았는데 재물을 탐하다가 파면된다. 그 뒤 동부승지에 기용되지만 다시 파직당하고, 1년 만에 복직되어 삼척 부사로 부임하였으나 과격한 발언 때문에 또다시 파직된다. 말년에는 청렴결백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나 재물 문제로 탄핵을 당했다. 그 뒤에는 강릉 초당의 맑은 물로 두부를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이 바로 초당두부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아버지의 영광과 굴욕의 가족사를 지켜보면서 그는 권력에서 멀리있는 사람들의 설움과 한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허균은 평소 서얼들과 가까이하면서 지냈을 뿐만 아니라 이들과 규합하여 혁명의 뜻을 다져나갔다. 당시 서자들의 모임인 강변칠우(江邊七友)들과도 어울려 지냈다.

강변칠우는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응서, 이조좌랑을 지낸 심전의 서자 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양갑, 평난공신(국난을 평정한 공신) 박충간의 서자 치의, 북병사(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경준, 박유량의 서자 치인 등이었다.

이들은 1608년 연명으로 서얼차별의 폐지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고 경기도 여주 강변에 윤리가 무너진 곳이라는 뜻의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화적질을 하기도 했다.

허균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쏟아놓고 있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는 귀한 집 자식이라고 하여 그 재주를 더 많이 주고, 천한 집 자식이라 하여 인색하게 덜 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 어진 사람들은 이런 것을 분명히 알고 인재를 초야에서 구하기도 하고 하찮은 군사 속에서도 구하였다. 또 더러는 항복한 오랑케 장수 가운데서도 뽑았으며 심지어 도둑이나 창고지기 중에서 등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뽑힌 사람들은 모두 그 일에 알맞았고 각기 자신의 재주를 제대로 펼 수 있었다. 그러니 나라로서는 복됨이었고 다스림은 날로 새로워졌다. 이것이 사람을 바로 쓰는 길이었다“

허균의 시대의 적폐에 대한 일갈은 계속된다. 대대로 벼슬하던 가문이 아니면 높은 벼슬에 오를 수가 없고 시골에 숨어 사는 사람은 재주가 있더라도 막혀서 쓰이지 못하는 나라의 현실을 한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로 중국과 왜라는 두 오랑케 사이에 끼어있는데 재주있는 사람듫이 나라를 위해 쓰이지 못하여 나랏일을 그르칠까 걱정스럽다. 그런데도 스스로 그 길을 막고 인재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남쪽으로 가려면서도 수레를 북쪽으로 모는 것과 같다. 차마 이것을 이웃 나라에서 들을까 부끄럽다.

하늘이 사람을 보냈는데 사람이 그걸 버렸으니 이는 하늘의 도리를 어기는 것이다. 하늘의 도리를 어기면서 하늘의 뜻을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균은 그러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행한다면 좋은 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홍길동이를 통해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탐관오리들이 불의로 착취한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양민들을 구제하는 의적이 된다는 내용으로 엮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홍길동이 도둑들을 이끌고 경치가 수려한 율도국으로 들어가 마침내 왕위에 올라 만백성을 잘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이것은 바로 교산 허균이 꿈꾸던 이상향, 즉 차별 없는 세상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치의 옳고 그름을 권력이 재단하는 시대에 봉착했다.

청와대를 비롯, 국회와 법원이 권력의 재정비에 묘수를 짜내고 있다. 각 자치단체에서도 집권 2년차를 맞아 새롭게 정비하고 있다.

권력 바로 쓰여지고 있는 지, 인재등용이 옳게 이뤄지고 있는 지 곰곰이 새겨 봐야할 시간이다./편집국장 백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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