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필암서원'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7.15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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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문화유산 지정으로 세계에 우뚝 선 필암서원

확연루는 서원의 출입문과 유생들의 휴식공간 역할을 하는 문루이다. 현판은 김인후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깻끗하여 확 트여 있고 크게 공정하는 "확연대공(擴然大公)에서 가져온 말이다, 편액 글씨는 송시열 선생이 썼다.
확연루는 서원의 출입문과 유생들의 휴식공간 역할을 하는 문루이다. 현판은 김인후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깻끗하여 확 트여 있고 크게 공정하다는 "확연대공(擴然大公)에서 가져온 말이다, 편액 글씨는 송시열 선생이 썼다.

필암서원은 이제 국가 사적 문화재가 아닌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장성 사람들은 세계문화유산을 가진 빛나는 문화 고을의 주인공이 됐다.

그런데 우리는 필암서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동안 깨닫지 못했던 필암서원과 그 주인공 하서 김인후의 가치는 무엇일까?

혹자가 물으면 “필암서원은 이런거야, 하서 선생은 이런 인물이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번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계기로 필암서원과 하서 선생의 특질을 이해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필암서원의 내력

“마을 입구에 붓 바위가 있어 필암(筆巖)”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위치한 필암서원은 조선 전기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이름을 필암(筆巖:붓 필, 바위 암)이라 지은 것은 그의 고향 맥동 마을 입구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 하며, 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하서 김인후가 태어났다고 한다.

▲평지에 자리 잡은 필암서원은 교육과 학문 수련의 공간을 앞쪽에, 제사 지내는 공간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학문을 중시했던 하서 김인후의 뜻을 기리기 위함으로 알려진다.

▲1590년(선조 23) 하서의 제자 변성온(卞成溫)ㆍ기효간(奇孝諫)ㆍ변이중(邉以中) 등 호남 선비들이 하서의 사후 30년을 맞아 그의 고향 마을 인근 장성읍 서쪽 기산리(岐山里)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제향(祭享)을 시작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서원이 소실되었다.

▲1624년(인조 2) 추담 김우급(金友伋) 등 지방 선비들의 노력으로 기산리(岐山里) 서쪽 증산동(甑山洞)에 이건 복설하였다.

▲1659년(효종 10) 3월 '필암'(筆巖)이라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사액(賜額) : 임금이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편액(扁額)을 내리는 것)

▲1662년(현종 3) 2월 현종이 어필로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 선액(宣額)하고, 예조정랑 윤형계(尹衡啓)를 예관(禮官)으로 보내 사제(賜祭) 하였다. 이로써 필암서원은 경제력을 확보하여 서원으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갖추고, 사회적 지위와 위상을 높힐 수 있었다. (선액(宣額) : 임금이 친필로 서원의 이름을 지어 편액(扁額)을 하사함)

▲1672년(현종 13) 3월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마을 이름도 해타리(海打里)에서 필암리(筆岩里)로 바뀌었다. 이건(移建)에는 원장 송준길(宋浚吉)의 협조와 남계 이실지(李實之. 1624~1702)· 기정연(奇挺然. 1627~?, 금강 현손)·박승화(朴升華, 백우당 증손)등의 노력이 있었다.

▲1786년(정조 10)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徵 1532~1594)을 종향(從享)하였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는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됐다.

▲1972년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 1975년 대한민국의 사적 제242호로 승격되었다.

▲2008년 유물 전시관인 '원진각'(元眞閣)과 '삼연정'(三然亭)등을 준공하고 2010년 원진각 뒷편에 청소년ㆍ유림들의 한학교육 및 선비 체험 교육 공간 목적의 평생교육센터인 집성관(集成舘)을 준공했다.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무슨 건물, 유물이 있나?

맑고 깨끗한 인품 닮은 ‘확연루’

인종이 세자시절 스승이자 절친이었던 하서 김인후에게 그려준 '묵죽도'
인종이 세자시절 스승이자 절친이었던 하서 김인후에게 그려준 '묵죽도'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를 비롯, 신문(神門)·동서 협문(夾門)·전사청(典祀廳)·장서각(藏書閣)·경장각(經藏閣)·진덕재(進德齋)·숭의재(崇義齋)·청절당(淸節堂)·확연루(廓然樓)·장판각(藏板閣)·한장사(汗掌舍)·고직사(雇直舍)·행랑·창고·홍살문·계생비(繫牲碑)와 하마석(下馬石) 2개 등이 있다.

필암서원 출입문에 해당하는 확연루가 손님을 맞는다.

확연루의 확연은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나온 말로 거리낌 없이 넓게 탁 트여 공평무사하다는 의미다. 우암 송시열(1706~1789)이 쓴 이 글씨는 인품이 맑고 깨끗하고 확연하여 매사에 공정한 하서의 인물 됨됨이를 기리기 위해 우암이 특별히 택한 글씨로 알려진다.

사우인 우동사의 중앙에는 김인후의 위패가, 왼쪽에는 양자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전사청은 향례(享禮) 때 제수(祭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경장각에는 인종 대왕이 하사한 묵죽판각(墨竹板刻)이 보관돼 있고, 진덕재와 숭의재는 동재(東齋)·서재(西齋)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청절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됐다. 장판각에는 『하서집(河西集)』 구본 261판과 신본 311판을 비롯한 637판의 판각이 보관돼있다.

장서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과 『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 보물 제587호인 노비보(奴婢譜) 외 문서 69점이 소장되어 있다.

계생비는 향사에 제물로 쓸 가축을 매어 놓는 비로, 제관(祭官)들이 그 주위를 돌면서 제물로 쓸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다.

유물로는 벼루와 기준(奇遵)이 방문 기념으로 기증한 붓 등이 있으며, 재산은 전답 1만 2700평과 임야 10정보가 있다.

◆하서는 누구인가?

하서 선생은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는데 하서 선생과 인종은 각별하였으며 인종은 그의 강의에 매료되고 의기가 상통하여 그 정표로 묵죽도를 하사했다고 한다.
하서 선생은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는데 하서 선생과 인종은 각별하였으며 인종은 그의 강의에 매료되고 의기가 상통하여 그 정표로 묵죽도를 하사했다고 한다.

정조대왕 “동방의 주자이며 호남의 공자이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위대함을 대변해 주는 말들은 너무나 많다.

정조는 하서를 문묘에 종사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경은 해동의 염계(濂溪)이자 호남의 공자이다. 내면에 쌓인 강건하고 곧고 단정한 성품은 엄동설한의 송백이었고, 밖으로 들어난 빛나고 온화하고 순수한 자태는 맑은 물위의 연꽃이었다”고 극찬했다.

확연루 편액을 쓴 우암 송시열은 “국조 이래 도학과 절의, 문장을 겸비한 인물은 하서 김인후 선생이다. 그 맑은 풍채와 큰 절개는 기운을 용동시키고 빛을 떨쳐 완만한 자는 청렴하게 하고 겁쟁이는 바로 서게 하였으니 비록 백세의 스승이라 해도 가하다”라고 했다.

신재 최산두는 하서의 인품을 지칭하여 “가을 물, 얼음 항아리”라고 칭했다.

하서 선생은 장성 출신, 본관은 울산(蔚山)으로 아버지는 참봉 김령(金齡)이며, 어머니는 옥천 조씨(玉川趙氏)이다.

1519년, 9살의 나이에 김안국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퇴계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등용된다.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훗날 인종 임금. 하서보다 5살 연하였다.)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후에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1545년(인종 1) 인종이 즉위 1년 만에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 여러 관직에 임명됐지만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관직이라지만 제자인 인종이 죽은 마당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킨 굳건함을 보여준 사례다.

◆하서의 학문세계와 철학은?

자신보다 ‘타자의 성취’를 더 큰 이념으로

하서 김인후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하서의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이라는 일관된 주제에 다양한 변주의 사유와 철학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하서가 추구했던 도덕생명의 실현은 본질적으로 남들을 향해 열려있었다. 그의 학문은 일신의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타자의 성취’가 목표였다.

그가 목표로 삼은 ‘타자의 성취’ 이념은 단순히 지식인으로써 갖는 사회적 책무의식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지만물을 그의 존재 안에 아우르는 생명정신의 자연스러운 발로였으며 존재의 실천적 의지였다.

이러한 사고의 발현은 그가 제자들에게 학문의 규모로 강조했던 ‘西銘’에 잘 나타나있다.

“만민은 나의 형제요, 만물은 나와 더불어 사는 이웃”(民吾同胞 物吾與)

하서의 철학은 인간애와 생명애의 이념을 그 정점에 세운다.

인간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을 향해 열려있는 그의 마음은 개미 한 마리, 풀 한포기조차 소홀히 지나치지 않는 물아일체의 사랑으로 눈빛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서는 나라의 재상에게 이렇게 말한다.

“仁者는 천지만물을 자신과 한 몸으로 여겨 온 천하의 질병과 아픔을 모두 자신의 것처럼 절실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백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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