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 죽지 못해 살았던 아픈 시대의 주인공은?
편집국에서 // 죽지 못해 살았던 아픈 시대의 주인공은?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7.1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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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역사의 가장 비극적 삶의 시대 들춰보기-

과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대를 살다간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차마 죽지 못해 살았던 시대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들이라면 어떠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현 시대를 최악의 난국이라고 한다. 경제지표가 최저를 가리키고 있으며 곳곳에서 파업과 데모가 끊이지 않고 있다. 밖으로는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일제 치하의 백년 전이나 임진왜란의 4백년 전이나 결코 다르지 않다.

무더위가 대지를 내리치는 초여름, 비극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 역사에서 가장 살기 어려웠던 시대를 산 사람들은 아마도 400년 전 쯤인 1580년대에 태어나 1640년대까지 60년의 세월을 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10대와 20대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40대에 정묘호란을, 50대에 병자호란을 겪었다.

이들은 나라 밖 침략자들로 당한 수모도 수모이거니와 나라 안에서 무능한 임금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고통과 이를 악용하여 개인의 영달을 노리는 못된 정치인들의 수탈로 백성들은 차마 눈뜨고 살 수 없는 생지옥을 겪었다.

역사서에 남아있는 이 무렵 참상의 기록은 상상을 초월한다.

서애 유성룡은 저서 ‘징비록’에서 “전쟁뿐 아니라 연이은 극심한 가뭄으로 굶주림이 만연하고 역병까지 겹쳐 대부분 죽고 백명에 한명 꼴로 살아남았다. 부모 자식과 부부가 서로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러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나뒹굴어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임진왜란의 비극을 말해주는 또다른 흔적은 일본 교토시에 있는 이총(耳塚:귀무덤)이다.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전승의 기념으로 조선군 뿐만 아니라 조선인 남자, 여자, 어린이를 죽여 코와 귀를 잘라 통속에 넣고 매일매일 소금이나 식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 만든 무덤이 이총인데 그 높이가 8m에 달한다. 이 귀무덤에는 조선인 12만6천 명의 귀와 코가 묻혀있다.

흔히 ‘계갑 대기근’이라고 부르는 이 무렵 가뭄은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 계사년과 1594년 갑오년에 연이어 일어난 대기근을 말하는데 먹을 풀뿌리조차 없었던, 우리 역사에서 최악의 가뭄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가뭄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배고파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는데,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전염병까지 휩쓸어 산 사람이 드물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신하들 사이에는 당파싸움이 계속됐다.

그러던 중 전쟁의 후유증이 가라앉을 무렵인 1627년 3월 1일, 후금이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해왔다. 정묘호란이었다.

후금의 침공 소식이 한양에 전해짐과 동시에 기마병을 앞세운 후금 병사들이 불과 10일 만에 평양성을 점령했다. 인조는 부랴부랴 강화로 피신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했다. 힘이 없는 조선은 결국 후금과 ‘형제지국(兄弟之國)의 맹’을 맺고 전쟁을 끝냈지만 후금은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점령자로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급기야 1632년에는 거만해진 후금이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兄弟)의 맹’에서 ‘군신(君臣)의 맹’으로 양국관계를 고칠 것을 요구하고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후금은 1636년 12월 9일 10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병자호란이었다.

1637년 2월 24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하는 의식을 치르며 전쟁은 끝났으나 항복의 조건은 참으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처음에 후금은 항복의식으로 반합(飯哈)이라 하여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항복'하는 의식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정하여 다시 조정했는데 그 항복 의식이 바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 禮)라는 것으로, 황제의 발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도록 하는’ 굴욕적인 항복의식이었다.

대표적인 항복 조약으로는, 왕은 큰 아들과 다른 아들, 대신들을 후금에 인질로 보낼 것, 후금의 명절과 경조사에 조공과 사신을 보내 예를 표할 것, 조선 여자와 마음대로 혼인할 수 있도록 할 것, 성루를 쌓거나 보수하지 말 것, 조선인 포로를 돈을 내고 속환할 수 있도록 할 것, 명나라를 칠 때 지원군과 병선을 보낼 것 등이었다.

그러나 조약의 속 내용을 보면 상상을 초월했다. 왕이 무릎을 꿇고 피눈물 흘리며 빌었으니 지배자의 위상이 어떠했겠는가?

조선에 남아있던 후금의 관리들은 조선 땅이 자기 것인 것처럼 무법천지로 행세했고 필요한 것, 맛있는 것이 없으면 왕을 족쳤다. 조선의 예쁜 여자들은 통혼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첩으로 만들었고 본국에 수없는 처녀들을 공물로 바쳤다.

당시 백성들은 어쨌을까?

왕이었던 인조 조차 죽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하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거리에는 무자비한 오랑케가 점령하고 있었고, 한겨울 혹한이 몰아닥쳐 동사자가 수없이 발생했으며, 군사들은 말을 죽여 고기를 먹었을 정도였다.

400년 전과 상황을 단순 비교할 순 없지만 아마 그때 우리 조상들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참을 만하다는 결론이다.

총체적 경제난국이라는 말도, 정치 위기라는 말도 ‘어림 턱도 없는 소리’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와 패자 사이를 번갈아가며 순환한다.

언제 또 과거와 같은 비극이 도래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시대의 추이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면 패자의 역사로 남게 될 것이 뻔하다./백형모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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