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 독야청청하리라 생각했을까?
혼자만 독야청청하리라 생각했을까?
  • 장성투데이
  • 승인 2018.04.0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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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민신문의 ‘절묘한 타이밍’ 지적에 대해

지난 3월 26일자 장성군민신문에서 기자수첩을 통해 ‘절묘한 타이밍?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라는 글을 썼다.

거기에는 우리 ‘장성투데이’를 의식해 ‘OO투데이’라는 주간신문사가 창간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우리 신문의 창간을 이번 6ㆍ13선거와 연관시키는 목소리가 있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지방선거를 의식해 창간하지 않았는가,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역신문들이 경영도 어려운데 얼마나 발행하다 그만둘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꼬집기성 기사였다.

동종의 언론사로서, 창간을 축하하고 진실한 동반자로 나가기를 희망하는 수준이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소망 사항이었을 뿐이다. 마치 언젠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비아냥 수준이었다.

사람들이 알 듯 말 듯 ‘OO투데이’라고 적고 있는 제호의 신문은 분명 우리 ‘장성투데이’를 말함이다. 이런 표현에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주민들이 다 아는 사실이니까 할 말 있으면 그냥 ‘장성투데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다 아는 사실을 교묘하게 숨길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지는 그런 글을 쓴 신문에 대해 당당히 ‘장성군민신문’이라 밝히는 바이다.

이제 할 말 좀 하자.

언론은 지역사회의 필요에 의해 생겨나고 그 지역민들의 할 말을 대신하는 것이 본질이다.

지금은 6ㆍ13선거를 앞두고 지역민들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균형있는 뉴스와 정보를 제공할 아주 중요한 시기다.

그런데 지금까지 장성군민신문은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고 균형있는 판단을 하도록 신문을 제작해왔다고 생각하는가?

언론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사실관계 확인 없이 지난해에만 언론중재위에 회부되어 정정보도를 낸것이 한 두 건이 아닌 걸로 알고 있다. 뿐만아니라 바로 지난달만 해도 마을분쟁사건과 관련해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보도로 또 한번 중재위의 경고를 받아 반론보도문을 기재했음에도 전혀 나아진 바가 없다.

장성군민신문처럼 머리기사부터 군정 비난을 일삼고, 시위나 부정을 들춰내는 것을 주목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을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장성군민을 ‘이쪽 사람 집단’과 ‘저쪽 사람 집단’으로 양분시키는 역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자문해보길 권한다.

언론인으로서, 언론사로서, 언론중재위 앞에 불려 나가 잘못을 소명하고 정정보도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를?

‘내편 네편’ 편가르기에 엄중 경고

그렇다.

바로 이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우리 장성투데이가 창간했다.

장성에 지역신문이 하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던 절묘한 타이밍에 창간했다.

만약 우리 장성투데이가 없었다면 군정과 군민들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길들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번 6ㆍ13선거에서도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끌고 가고, 출마자들의 당락을 좌우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불행하게도 그런 시기는 지나갔다.

장성투데이는 장성 역사에 꼭 필요한 존재로 우뚝 설 것이다. 군민들에게 좀 더 객관적이고 좀 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제공하는 언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조중동이 한국 언론을 좌우하던 시절이 있었다. 보수성향을 버리지 못하던 그 신문들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뒤에도 끝까지 그들만의 권익을 위해 정권 파헤치기를 거듭했다.

그 결과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 냈다. 그 역사의 결말은 지금 어떤가?

편협한 아집으로 국민을 몰고 가고, 그들만의 입장으로 재해석하던 언론의 결말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장성투데이는 창간 역사가 짧은 만큼, 확실하고 진실한 보도만을 지향할 것이다.

만약에 잘못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군민들로부터 비난받을 자세가 돼 있다.

다만 장성의 명예를 추락시키거나 장성 발전을 저해하는 일만큼은 누구에게나 엄중히 책임을 물을 것이다.

‘장성투데이’는 장성을 ‘내편과 네편’으로 나누는 편가르기 도구가 아니라 ‘소통과 화합’의 창구가 되도록 책무를 다할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발행인 박경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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