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 "궁형을 당한 처절한 몸부림이 '史記'를 만들었다"
편집국에서 - "궁형을 당한 처절한 몸부림이 '史記'를 만들었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8.19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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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과 사기를 다시 읽을 수 있는 인문학 강좌

중국 고전에 따르면 고대에 5형(刑)이 시행됐다.

사형(死刑)·궁형(宮刑)·월형(刖刑: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의형(劓刑:코를 베는 형벌)·경형(黥刑:얼굴·팔뚝 등의 살을 따고 홈을 내어 죄명을 찍어넣는 형벌)을 일컬어 5형이라 했다.

이 중에서 궁형은 남녀 생식기에 가하는 형벌로서, 남자는 생식기를 거세하고, 여자는 질을 폐쇄하여 자손의 생산을 완전 불가능하게 만든 형벌이었다. 궁형은 죽임을 면할 뿐 사형에 버금가는 극형이었다.

중국에서 궁형에 처해져 비극적인 삶을 살았으나 결코 비굴하지 않았던 한 인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는 ⌜사기⌟(史記)를 저술한 사마천(司馬遷)이다.

사기는 그의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에 따라 저술된 역사서로 중국 전설의 황제시대로부터 당시 지배자로서 동시대의 지배자인 한무제에 이르기까지 2000년을 다루고 있다.

특히 주나라가 붕괴되면서 등장한 제후국을 중심으로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흥망성쇠 과정을 다룬 인물 중심의 통사다. 역사 속에 명멸해간 각국의 생존사와 제왕과 제후, 수많은 신하, 영웅호걸들의 부침이 기록돼 있고 그 이면에 펼쳐진 개개인의 처세술과 고난 극복기가 곳곳에 각인 돼있다. 한자로 된 고사성어의 대부분은 이 사

기에서 출처됐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역사상 가장 많은 지식인들이 사기를 ‘인간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파헤친 인간학의 보고(寶庫)’라고 꼽는 이유다.

사기는 동양뿐 아니라 세계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으며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사성(史聖)으로 불린다.

그가 궁형이란 천형의 형벌을 받고도 엄청난 역사서 편찬에 몰두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편찬을 앞두고 남긴 소회를 통해 그 의도를 살펴보자.

“역사서에는 오직 평범하지 않은 사람만이 거론될 뿐이다. (중략) 한 시대를 살던 보통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기록할 도리가 없다. 때문에 평범하게, 한 시대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에 표본이 되고자 한다”

사마천이 스스로 말한 것처럼 사기는 발분(發憤) 의식의 소산이다.

사기는 남자 구실을 못한 인간이 처절한 인간적 고뇌를 통해 이루어낸 산물이라는 데 가치가 있다. 사마천은 절망의 늪에 빠진 자신의 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일은 ‘진실한 역사의 기록일 뿐’이라고 믿었다. 현세에서 받은 치욕과 오명을 후대인들이 사후에 언제라도 씻어 주길 바랐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사마천은 한 나라 경제(景帝) 때인 기원전 145년에 지금의 섬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은 한 무제 때 사관인 태사령에 임명된 역사가였다. 사마천은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 그 뒤 20세부터 3년 동안 전국을 유람하며 학문과 시야를 넓힌다. 그리곤 마침내 28살에 낭중(郎中)이란 공무원이 된다. 낭중은 한나라의 벼슬 중에 가장 낮은 관료였다. 그런데도 황제인 한 무제는 순행(巡幸:임금이 나라를 살피기 위해 돌아다니는 일)을 할 때 사마천을 데리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도중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살아있는 역사를 집필하라’는 유언을 남기자 사마천은 유언을 지키기 위해 틈틈이 집필에 나선다. 그러던 도중 시련을 맞게 된다.

한나라 장수 이릉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족과 싸우다가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모든 사람들이 이씨 가문에 먹칠을 한 일 일뿐 아니라 한나라 조정의 체면을 깎아 내리는 사건이라고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릉의 투항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변호하고 나섰다.

사마천은 이 사건으로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법에 따라 주살되느냐, 둘째는 돈 오십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이냐, 셋째는 궁형을 감수할 것이냐의 선택이었다.

사마천은 두 번째 선택으로라도 해 볼려고 있으나 보통의 관리 신분으로 거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마지막 궁형을 선택하게 된다. 목숨만이라도 부지하여 선친의 유지를 지킬 것을 선택한 것이다.

궁형이라는 처절한 고통을 감내한 사마천은 자기가 모셨던 한 무제에 대한 원망을 사기의 전편에 스며들게 했고 여러 유형의 인간 탐구를 통해 ‘역사는 결코 왕후장상에 의해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사기가 주목받는 점의 하나는 저자인 사마천이 동시대의 황제인 한 무제의 치세와 사회상을 당당하게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시대에 누가 살아있는 신의 권력인 황제 앞에서 비판의 붓을 바로 들 수 있었겠는가?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하며 “정본(正本)은 명산(名山)에 깊이 간직하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 후세 성인군자들의 열람을 기다린다”고 했다.

사마천은 한 무제가 자신과 아버지 경제(景帝)의 치부를 드러낸 것에 대해 노여워할 것으로 예상하고 정본을 숨기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기는 당나라 때부터는 관리 임용 시험 과목에 포함되고 송나라 때부터는 역사가와 문인들의 주된 관심 대상이 됐다.

그런 사마천의 일생과 사기를 다시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인문학 강좌가 열린다. ‘사기, 인간의 길에 답하다’라는 프로그램으로 9월 19일부터 장성 공공도서관에서 매주 목요일 저녁에 펼쳐진다. 무료강좌로 선착순이다.

문불여장성의 군민들에게 학문의 즐거움을 선사할 기회로 여겨진다.

/편집국장 백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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