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 亂世다. 왜 당파싸움만 몰두하는가? 일본은 보이지 않는가?
편집국에서 - 亂世다. 왜 당파싸움만 몰두하는가? 일본은 보이지 않는가?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9.02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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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적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꼭 40년 전인 1542년 안동 하회마을에서 한 인간이 태어난다.

서애 유성룡이란 사람이다.

그가 없었으면 이순신 장군의 발탁도 없었고 반대파의 모함으로 위기에 처한 이순신의 목숨도 날아갔을지 모른다. 그랬더라면 조선은 왜구 침략으로 영원히 사라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임진왜란 7년을 몸소 겪은 유성룡이 말년에 안동 하회마을에 내려가 ‘내가 스스로 반성하여 후환을 대비한다’는 뜻의 ‘징비록’을 쓴다. ‘징비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스스로 경계하는 것은 후환을 대비하는 것일세. 나는 벌로 하여금 스스로 독한 침을 구하게 하지 않으려네. 처음에는 도충(桃蟲:작은 휘파람 새)에 지나지 않지만 큰 새 되어 펄펄 날고 싶었네. 그러나 많은 어려움을 감당 못해 나는 여전히 료(蓼·여뀌풀) 위에 앉아 있네….’

조선의 국운을 걱정하여 지은 이 ‘징비록’은 숙종 때인 1695년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 사신이 이 사실을 알고 조정에 보고했다. 서인(西人)정권이던 조정은 ‘징비록’을 금서로 지정했다. 이와 함께 유성룡에 대한 평가도 사실상 ‘금기’가 됐다.

400년간 조선에서는 누구도 ‘징비록’을 읽지 않았다. 그리고 400년 후 조선은 또 일본의 침략을 받아 36년간 식민지에 놓이게 된다.

왜곡과 분란의 씨앗, 당파싸움!

오늘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에서 서애 선생을 곰곰이 반추하는 이유는 국운이 촌각에 달린 시국에서도 당파 싸움에 멍들어 나라를 뒷전에 밀치고 있는 임진왜란 때의 위정자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때 임금을 보필하는 국정 최고 책임자의 자리인 영의정이었다. 전시에 국정을 통솔하는 최고 군직인 도체찰사도 맡고 있었다.

선조 초기 좌의정이었던 유성룡은 1591년 2월, 하찮은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을 6품계나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가 되게 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이다. 그의 안목이 주목받는 이유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해 있는 상황에서도 조선의 위정자들은 집단 이기주의와 당파 싸움에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런 와중에도 유성룡은 오직 나라의 미래를 생각했다.

조선 개국 이래 최고의 존망 위기인 임진왜란 때 유성룡과 이순신이라는 신하가 있었기에 나라를 건질 수 있었다.

이순신은 전투에 있어서 불패신화를 이루면서 왜군을 물리쳐 반전의 계기를 만들었지만 유성룡은 무인보다 문인의 권력이 훨씬 우세했던 당시에 문인들의 모함에 휘둘려 내쳐질 위기의 이순신을 온전하게 구해내 사직 보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유성룡은 능력이 뛰어난 자라면 장사꾼이나 병졸들도 눈여겨 보았고 첩의 자식인 서얼이나 노비의 자식이냐를 불문하고 발탁해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는 길을 터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같은 주장이 사대부 관료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먹혀들었던 이유는 개인적인 사리사욕이나 당파간의 이해득실보다 나라를 우선시하는 충심이 기반이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유성룡의 더 큰 가치는 당시 시대상을 읽을 줄 아는 탁월한 식견이었다.

중국에 망명하려는 선조를 막아야 한다!

유성룡의 지혜는 임진왜란 초기, 선조의 비겁한 피난길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1592년 4월 14일과 15일 부산진성 및 동래성이 함락되고 20일도 안된 5월 3일, 한양에 일본군 제1, 2, 3군이 무혈 입성했다. 그러자 선조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 대부분은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신하면서 나라의 존망보다 자신들의 안위만을 찾고 있었다. 무능하고 소심한 선조는 승지 이항복에게 명나라에 기대 몸을 보존하면 어떠냐고 슬쩍 흘렸다.

“승지의 뜻은 어떠한가?”

“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나라에 가서 호소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합니다”

그 순간은 조선이 살아남아 항거하는가, 명나라의 속국이 되는가를 가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선조가 다시 유성룡의 의견을 물었다. 이 때 유성룡은 선조의 참모로서 가장 결정적 선택을 주도한다.

“안 됩니다. 임금이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朝鮮)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선조는 “내부(內附, 중국에 가서 붙는 것)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라며 자신의 생각을 계속 밀어붙였다. 유성룡은 끝까지 반대하며 이항복을 꾸짖었다. “관동과 관북 지역이 버티고 있고, 호남에서 의병도 일어날 텐데 어떻게 경솔히 나라를 버리자는 의논을 내놓는가”라는 질책이었다.

이 말을 듣지 않고 만약 선조가 명나라로 들어갔으면 그 때부터 조선 땅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터가 되어 누가 이기든 승자의 속국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조국 후보자의 논쟁으로 날마다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대한민국이 걱정이다.

옆에서 일본과 중국, 미국이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나라의 안위를 망각하고 당파와 개인의 잇속만을 챙긴 임진왜란의 결과를 벌써 잊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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