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공공도서관, 찾아가는 한글학당 '눈물의 배움터'
장성공공도서관, 찾아가는 한글학당 '눈물의 배움터'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9.09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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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들과 카톡하려면 글자를 배워야제~"
10개면 22개 마을 332명 백발 어르신들 '열공 중'
진원면 작동경로당에서 한글을 배우시 위해 열공중인 마을 어르신들
진원면 작동경로당에서 한글을 배우시 위해 열공중인 마을 어르신들

여든이 훌쩍 넘은 어르신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 보통이 아니다. 대부분이 백발 머리에 꽃무늬 옷을 걸친 시골 할머니들이지만 교실 열기는 용광로 못지않게 후끈거린다.

“또박또박 따라하세요. 이제는 네 글자 배우기입니다. 허수아비.... 허수아비....”

아직 글자를 쓰기에는 서툴지만 읽기에는 자신 있다는 듯 선생님을 열심히 따라 반복한다.

2019년 9월 2일 오후 2시 장성군 진원면 작동마을의 작동경로당.

19명의 할머니들이 ㄷ자 모형으로 둘러 앉아 나이 지긋한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임동섭 선생님(68)은 공무원으로 정년한 뒤 재능기부를 위해 광주에서 1주일에 두 번씩 이 마을에 찾아와 한글 지도를 한다.

박옥자 반장이 예를 갖춘다.

“차려! 선생님께 경례, 안녕하십니까?”

“자 오늘 출석을 부르겠습니다. 이명순 어르신, 허리 아픈데는 없으시죠? 양동순 어르신, 비온디 어깨 쑤신데는 어쩌셔요? 배정자 어르신 오늘은 안경이 멋지요~”

출석을 부르는 선생님의 한분 한분 명단 체크는 어르신들의 존재감을 알리는 자리면서 건강과 안부를 묻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준다. 이날은 두 분의 할머니가 결석했다. 두 분 모두 할아버지가 몸이 아파 간병해야 한다고 결석 사유를 반장이 알려왔다. 노인들만 사는 시골이라 어쩔 수 없단다.

출석부 체크가 끝나자 선생님은 하얀 칠판에 수업 시작을 알린다.

작동경로당 한글수업시간
작동경로당 한글수업시간

“자, 오늘은 2019년 9월 2일, 숫자도 잘 쓸 줄 알이야 합니다아~. 요일로는 월요일입니다. ‘월’자를 천천히 다시 써보겠습니다. 월, 그리고 오늘 날씨는 비가 오니까 ‘비’ 이렇게 적습니다”

그리고는 지난주 숙제 검사에 들어간다. 어르신들이 수군거리며 노트를 펴고 숙제 검사에 긴장한다.

“지난주에 30번씩 써오라는 숙제 안 잊었죠. 잠시 검사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살짝만 봐도 잘 했는지 압니다아~”

마치 우리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배웠던 글자 수업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다만 지금은 7~8살 짜리 어린이가 아니라 70~80세 할머니들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정정지 할머니를 비롯해 3명이 86세 고령자들이다. 나머지도 대부분 80세를 전후한 나이다.

그 모진 세월을 글을 모르고 살아오면서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이름하여 ‘까마눈’의 설움이었다. 누가 그 통한의 설움을 알아줄까?

집에 우편물이 와도 어디서 누구한테 온 것인지 몰라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지금은 전화라도 가까이 있지만 옛날에는 서울로 올라간 아들 편지인지, 무슨 통지서인지 알 수가 없어 속에 불이 나기도 했다.

때로는 은행에서 돈 찾을 때 한글로 적어야하는 부담 때문에 은행 직원들에게 귓속말로 ‘나 얼마만 찾아줘’라고 부탁하던 서글픔도 있었다.

때로는 길거리 간판을 읽을 줄 몰라 지나치다가 어린 손주로부터 ‘에이 할머니는 그것도 몰라?’라고 핀잔을 당하기도 했다.

어떤 할머니는 “왜 한글을 배우냐”고 묻자 “연애 편지 쓸라고, 하늘나라에 있는 영감한테 편지 써 보낼라고...”하고 웃었다.

글자를 모르는 어르신들에게 한글은 하나님 나라 만큼이나 신비스런 영역이자 웬수(?)이기도 했다. 한글은 그 안타까움과 부끄러움, 회한, 원통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인생의 마지막 문턱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뭐라하든 배우리라 맘 먹었다. 설령 1년만이라도, 아니면 당장 죽는다 해도 속 시원히 읽고, 쓰고 해보고 싶었다. 손주들하고 즐겁게 카톡인지 뭔지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이 90을 보라보는 흰머리에도 불구하고 경로당에 모여 가나다라를 외치며 비뚤비뚤 글자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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