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 불꽃같은 짦은 생애를 산 개혁가 , 조광조!
편집국 칼럼 - 불꽃같은 짦은 생애를 산 개혁가 , 조광조!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9.23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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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사람이 우선인 정치, 전체 백성이 골고루 잘 사는 나라’를 꿈꾸었던 몸부림치는 혁명가 한사람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조광조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조광조를 생각하면 불행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다.

개혁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참을 줄도 알아야하는데 그 금줄을 넘지 못해 불행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정암 조광조(1482년~1520년)는 29세의 나이에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서 성리학에 매진한다. 하루 종일 관대를 벗지 않고 언행을 삼가며 성현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동문수학하던 남곤과 산책을 나갔는데 젊은 처자들이 지나가자 조광조는 계속 힐끔힐끔 쳐다봤고 남곤은 눈길한번 안주고 곧장 걸어갔다. 집에 돌아온 조광조는 자신의 행동을 자책했다. 그러자 이를 본 어머니 민씨는 말했다.

“젊은 사내가 여자를 보고도 어떻게 눈이 한 번도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남곤은 참으로 냉혹하고 무서운 사람이다. 겉으로는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그도 아가씨들에게 눈길이 쏠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사정 봐 주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하거나 외면할까 무섭구나"

이 말을 던진 어머니는 짐을 싸서 남곤의 집에서 최대한 멀리 이사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남곤은 훈구파의 주력 세력이 되어 신진 사림파의 주력인 조광조를 제거하는 주동자 역할을 한다.

그렇게 성장기를 거친 조광조는 문과에 합격해 홍문관에 들어간다.

반정으로 폭군 연산군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중종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준 훈구파들을 무시할 수 없었는데 훈구파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관직을 거머쥐었다. 그러자 중종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사림파인 조광조를 중용한다. 이른바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싹트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중종의 최 측근으로 다각적인 개혁정치를 펼치던 조광조를 수렁에 빠트리는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조정의 작은 부서인 소격서(昭格署) 존폐 논란 때문이었다.

소격서는 태조 이성계 시절부터 하늘에 제를 올리던 기관이었다. 세종 때도 폐지 논란이 있었으나 선왕 때부터의 오랜 관습으로 폐지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역대 왕들은 중국 천자처럼 산천에 제사를 지내며 왕권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소격서를 존치하고 싶었다.

그런데 중종 13년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가 소격서 혁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하찮은 기관인 소격서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변모한다.

이 발단은 종묘 대제에 쓸 제물인 소가 종묘의 문턱을 넘다가 쓰러져 죽은 사건이었다.

중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책 회의를 열었는데, 자리에서 조광조는 "조선의 제례가 옛 방식과 맞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 불을 붙였다.

이에 좌의정 신용개는 "제례 방식을 바로 잡기 위해 소격서와 같은 도교식 제례 의식을 하는 관청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영의정 정광필은 "옛날부터 해온 것이므로 굳이 폐지할 필요는 없다"면서 반대했다.

조정이 소격서의 존폐 양론을 두고 격랑에 휩싸이는 순간이다.

중종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자 조광조는 중종의 소격서 폐지 망설임을 강하게 비판한다.

“왕께서는 단단하고 굳은 것은 버리고, 유약하고 부질없는 것을 생각하며, 이리저리 정처 없이 헤매며 부질없는 것에 연연해하며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누구보다 믿고 싶었던 신하 조광조의 주장에 중종의 심정이 편할 리 없었다. 그런데 개혁 성향을 보인 여러 신하들이 소격서 폐지를 거듭 주장하고 조정에 출근을 거부하자 조광조는 다시한번 왕의 행동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는 (어리석은) 암군(暗君)이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일은 너무도 그릇되어 저희들이 눈을 씻고 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마음과 말이 격분하여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마치 왕 앞에서 신하가 분노하여 부르르 떠는 듯한 격한 상소문이었다.

지엄한 왕 앞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개혁을 꿈꾸던 조광조는 백성의 절반이 노비가 되어가는 현실을 타파하려면 토지개혁, 신분제 완화 등 강도 높은 개혁이 필요한데, 고작 소격서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고 물러선다면 이후의 개혁들도 막히고 새로운 정치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반면, 중종은 소격서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조광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왕권에 손상이 온다고 판단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두 달 이상 지속된 논쟁 끝에 소격서는 결국 폐지됐다. 하지만 중종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정책을 두고 조광조가 이겼지만 최후의 승자는 아니었다.

연산군을 끌어내리고 집권한 중종은 주변의 훈구파 공신세력을 적당히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와 사림들을 키워 등용시켰건만 이들이 자기 말을 들으려하지 않음에 분노하게 된다.

결국 별것 아닌 일이 왕권을 둘러싼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 조광조는 훈구파에 의해 역모죄를 뒤집어 쓰고 화순으로 유배되고 끝내는 사약을 받아 짧은 삶을 마감한다.

왜 참지 못하고 용의 비늘을 건드렸을까?

조금만 참아가며 시대 개혁의 화두를 던지고 실천해 나갔더라면 조선이 훨씬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편집국장/백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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