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곽재우 의병장의 ‘피맺힌 상소’를 다시 새긴다-백형모
[편집국 칼럼]-곽재우 의병장의 ‘피맺힌 상소’를 다시 새긴다-백형모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10.14 1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든 신하가 날마다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으니
이 어찌 바른 나라입니까?”

편집국 칼럼-곽재우 의병장의 ‘피맺힌 상소’를 다시 새긴다.

“모든 신하가 날마다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으니
이 어찌 바른 나라입니까?”


“어리석은 신의 소신으로도 지금 나라 안을 살펴보면 참으로 위급합니다. 종묘사직은 잿더미로 변하고 백성은 열에 두 세 명도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흥의 대업을 이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왜적의 괴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죄악이 많아 죽었다 하니 이것은 하늘이 우리는 도와서 전하로 하여금 중흥의 대업을 이룩하게 하려는 뜻일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조정에는 동서남북으로 붕당이 나눠졌다는데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어느 당이 군자당이고 어느 당을 소인당이라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어느 당이 군자가 더 많고 어느 당이 소인이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하께서는 지금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려 해도 누가 어진 신하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으며 간신을 멀리 하려하지만 아직 누가 간신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대소신하가 붕당으로 나뉘어 자기 당에 들어오면 추켜올리고 나가면 배척하여 서로 제 당이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날마다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국가의 흥망과 백성의 이해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니 장차 나라를 망쳐놓고야 말 것입니다. 그걸 염려하여 신은 지금 통곡하고 한숨을 내 쉬고 있습니다.

외람되게도 성은을 입어 병마절도사의 중책을 맡게 되었고 선대에까지 벼슬을 내리시니 영광이 저승에까지 미쳐서 감격의 눈물대신 변방을 잘 지켜서 조금이나마 성은에 보답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신은 지병이 있고 정신이 맑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리만 지키고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서 나라를 욕되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전력이 있는 장수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지금은 왜적이 물러가고 별일이 없는 때라서 물러나지만 만약 변란이 생겨 급할 때에는 신은 다시 갑옷을 입고 군사의 선두에 설 것이며 구차하게 목숨을 보존하려고 전하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벼슬로 묶어 두지 말고 한 어부로 보시어 강가에서 한가하게 살게 해 주소서. 강가에 어부가 나라에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각기 붕당을 지어 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하여 극가의 흥망은 잊고 자신의 이익만 꽤하는 자들과는 다를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부디 굽어 살펴 주소서.”

이 상소의 주인공인 곽재우(1552~1617) 장군이다. 우리가 홍의장군으로 부르는 그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사비를 들여 의병을 조직해 왜군과 싸웠던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공을 인정받아 벼슬을 받았던 전쟁영웅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고향(의령)에서 책이나 읽던 평범한 선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왕이 의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자 22일 가장 먼저 의령에서 수십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 뒤 이웃마을과 진주까지 활동무대로 의병을 키우고 비범한 통솔력을 바탕으로 왜군을 무찔렀다. 수십 명으로 출발한 그의 의병은 순간에 2천명으로 늘어나고 연전연승을 거두게 된다. 덕분에 경상 우도를 지킬 수 있었고,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을 저지하기도 했다. 또 10월에는 김시민이 이끄는 1차 진주성싸움에도 의병을 보내 승리하게 이끄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같은 활약상을 안 선조는 그에게 벼슬을 내리지만 권위와 암투로 대변되는 관료 생활이 잘 맞지 않아 응하지 않는다. 그는 학문을 닦고 수양하며 정치적인 이상을 실현하는 데는 관심이 많았지만 실제로 자신이 권력의 한 가운데서 그걸 휘두르고 행사하는 데에는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배려준 벼슬을 받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낙향하여 안빈낙도와 학문에 정진하며 살았다. 대신들이 관직을 놓고 다투거나 파는 나누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을 하번도 그 안에 둔 적이 없었다.

그 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야 했다. 선조도 가장 절실하게 떠오른 이름이 곽재우였던 것이다. 2년 만에 이순신도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죽으면서 전쟁은 막을 내린다.

종전 직후 1599년 그는 경상우도 방어사에 임명되지만 상중을 핑계로 부응하지 않았고, 그해 9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나 부임 즉시 귀향해 버린다. 권력과 벼슬이 조금도 기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상소는 그가 병마절도사에 임명받은 뒤 지병을 핑계로 임관하지 않고 임금에게 바치는 쓴 소리다.
모든 신하가 붕당으로 나뉘어 날마다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는 당시 정국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것도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끝내고 그 전쟁의 먼지가 가라앉지도 않는 시기에 말이다. 그런데 이 상소의 내용 중에 왜구와 강화를 맺을 것을 권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사헌부에서 탄핵을 받아 1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 비극을 겪는다. 모두가 붕당의 소행이다. 벼슬을 버리고 그저 고향에 내려가 살고싶다고 호소하는데도 말이다.

문제는 이 상소문이 나온 지 500여 년이 흐른 지금, 조선의 후예들이 한 치도 다름없이 붕당론에 빠져 옳고 그름보다 진영의 논리에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호통재(嗚呼 痛哉)라!
오호애재(嗚呼 哀哉)라!    

/백형모 편집국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