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청와대까지
[편집국 칼럼]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청와대까지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11.04 1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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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모 편집국장-

1950년 12월 23일,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

죽기 살기로 모여든 20만 명의 피난민들이 장사진을 치며 살기어린 추위도 아랑곳 않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스라이 바다위에 떠 있는 덩치 큰 배에 올라타려는 승선 전쟁을 위해서였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6개월이 지나 공산당에서 해방 되는 듯 했지만 몹쓸 중공군이 쳐들어와 전세는 삽시간에 역전됐고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결정했다. 궁지에 몰린 유엔군은 이곳 흥남 부두에서 군인들과 전쟁 물자를 싣고 남쪽으로 행할 채비를 했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두고 철수하면 반공 피난민들은 모두 죽을 목숨이었다. 하지만 여객선이 아닌 군 수송선으로 그 많은 피난민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오직 살기 위해 아우성인 어린이와 노인들을 바라보던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의 레너드 라우 선장은 이윽고 대결단의 명령을 내린다.

“배에 있는 모든 무기와 군수물자를 버리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태워라”

그렇게 해서 정원 60명의 빅토리아호는 정원의 200배가 넘는 1만4천명을 배에 태우고 12월 23일 바람찬 흥남항을 출발, 사흘간의 항해를 거쳐 크리스마스 날인 25일 경남 거제도에 도착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배’라는 닉네임이 붙은 이 배는 그로부터 전설이 됐다.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가 되고 영화 국제시장의 모태가 됐으며 수많은 소설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흥남부두에서 이 빅토리아호를 타고 온 한분이 세상을 떠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그토록 잊지 못할 분으로 기록했던 모친 고(故) 강한옥 여사다.

문 대통령이 떠올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온통 '가난'뿐이었다.

강 여사는 함경남도 흥남 출신으로 함흥농고를 나와 흥남시청 농업과장을 지낸 남편 고(故) 문용형씨와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고향을 떠나 경남 거제로 피란 온 피란민이다.

강 여사는 6남매의 장녀였지만 피란을 오면서 형제들과 헤어졌다. 문 대통령은 "외가 동네는 흥남의 북쪽을 흐르는 성천강 바로 건너에 있었는데, 흥남으로 들어오는 '군자교' 다리를 미군이 막았다"라며 "어머니는 이남에서 혈혈단신이었다. 피난살이가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세상천지에 기댈 데가 없어서 도망가지 못했노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시곤 했다"고 회고했다.

거제에서 부친은 포로수용소에서 노무일을, 모친은 장남(문 대통령)을 업은 채 계란을 머리에 이고 부산으로 건너가 파는 행상으로 살림을 꾸렸다. 부부는 그렇게 돈을 조금씩 모아 문 대통령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1953년생인 문 대통령은 "나중에 어머니 회갑 때 어머니를 모시고, 내가 태어난 곳을 비롯해 부모님이 피난살이하던 곳을 둘러본 일이 있다"라며 "3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어머니는 살던 동네, 살던 집들을 모두 기억했다"고 했다.

아마도 피눈물 나게 겼었던 가난의 설움 때문에 잊을 수 없었던 현장이라서 그랬을 수 있다.

부친은 부산의 공장에서 산 양말을 전남지역 판매상들에게 공급해 주는 장사를 했다. 그러나 장사는 순탄치 않았고 그런 집안의 생계를 꾸려나간 것이 모친이었다. 강 여사는 구호물자 옷가지를 시장 좌판에 놓고 팔기도 했고 작은 구멍가게를 꾸리기도, 연탄배달도 했다.

문 대통령은 "나는 검댕을 묻히는 연탄배달 일이 늘 창피했다"라며 "오히려 어린 동생은 묵묵히 잘도 도왔지만 나는 툴툴거려서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고백했다.

문 대통령이 가난 속에서 가치관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를 가난 속에서 키우면서도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게 가르쳤다"라며 "그런 가치관이 살아오는 동안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부부는 장남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장성한 아들에게도 돈벌이를 운운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인지 문 대통령은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취업을 포기하고 사법시험을 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나중에 변호사가 되어서는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는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면서 ‘내가 옛날부터 살던 이 집과 이웃 친구들이 좋지 청와대는 싫구나...’라고 고집했던 강한옥 여사.

아들을 청와대의 주인공으로 들여보내고 행여라도 아들의 행보에 누를 끼칠까봐 ‘으리번쩍’한 청와대가 아닌 자신이 살던 그 옛집에 살기를 고집한 그분의 흔적이 더욱 크게 각인되는 이유는 뭘까?

철저하게 가난과 싸워 왔으면서도 아들에게 근검을 선보였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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