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부형청죄’가 무슨 소용인가!
[편집국 칼럼] ‘부형청죄’가 무슨 소용인가!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12.09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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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휘영청 내려앉은 깊은 겨울 밤이다.

부잣집 13살 어린 신랑이 장가 들어 처음 가본 신부 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게 됐다.

낮에까지 왁자지껄하던 손님들도 모두 떠나고 저녁이 되자 신방에 신랑과 신부만 남았다. 다섯 살 위 연지곤지를 찍은 신부가 따라주는 합환주를 마신 뒤 신랑은 촛불을 껐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설픈 신랑은 어른들에게 들었던 ‘첫날 밤에 신부의 옷고름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도 잠시 잊고 우두커니 달빛 어린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보름달 빛이 교교히 창을 어스름으로 물들인 야심한 삼경에 신부의 두근거리는 숨 소리가 적막을 더해줄 뿐이었다.

바로 그때 ‘서걱서걱’ 창밖에서 음산한 소리가 나더니 달빛 머금은 창문에 칼 그림자가 스치 고 지나갔다. 신랑은 온몸에 소름이 돋고 살이 떨렸다.

불현 듯 할머니한테 들었던 옛날 이야기가 생각났던 것이다. ‘첫날밤에 나이든 신부의 정부인 중놈이 다락에서 튀어나와 어린 신랑을 칼로 찔러 죽여 뒷간에 빠뜨렸다’는 전설이었다.

“허억, 시 시 신부~, 빠 알리 부부 불을 켜세요~”

허둥지둥 신부가 불을 켰지만 신랑은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다가 끝내 실신했다. 신부집은 발칵 뒤집혔다. 꿀물을 타 먹이고, 우황청심환을 구해오는 등 부산을 떤 뒤에 겨우 다시 숨을 쉬게 됐다. 신랑은 자기가 데리고 온 하인 돌쇠를 불렀다. 행랑방에서 신부집 청지기와 함께 잠자던 돌쇠가 불려와 안방에서 불안감을 달래주며 뜬 눈으로 지샜다.

어느덧 동이 트자 신랑은 돌쇠에게 고삐를 잡도록 하고 나귀를 타고 한걸음에 30리 밖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신랑은 두 번 다시 신부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하룻밤의 악몽을 뒤로 한 채 춘하추동이 수 차례 바뀌며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다. 그 사이 신랑은 과거에 급제해서 지체 높은 선비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고 새 장가를 든 뒤 아들딸을 낳고 옛일은 까마득히 망각의 강에 흘러 보냈다.

그러던 어느 겨울 날, 먼 곳의 친구 집에 초청을 받아 푸짐한 술상을 받았다. 송이 산적에 잘 익은 청주가 나왔다. 두 사람은 시를 읊으며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갔다. 그날도 휘영청 달이 밝아 창호가 하얗게 달빛에 물들었는데 그때 ‘서걱서걱’ 20년 전 첫날밤 신방에서 들었던 악몽의 그 소리, 그리고 생생하게 보았던 창문에 칼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선비는 들고 있던 청주잔을 떨어뜨렸다.

얼굴이 샛노래지면서 “악, 저 소리, 저 칼 그림자”하고 몸을 벌벌 떨었다.

그 때 친구가 껄껄 웃으며 “이 사람아, 저 소리는 대나무 잎 스치는 소리네, 그리고 저 것은 대나무 잎이 너울거리는 그림자일세”

그는 온 몸이 얼어붙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맞아 저 소리, 저 그림자였어... 그때 신방 밖에도 대나무가 있었지...”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친구 집을 나와 하인을 앞세워 밤 새도록 나귀를 타고 삼경이 넘어 20년 전 처가에 다다랐다. 소박맞은 영문도 모른 채 20여 년 동안 수절하며 살아온 그 신부가 청상과부가 되어 뒤뜰 별당채에서 희미한 호롱불 아래 물레를 돌리고 있었다. 선비는 그 모습에 땅을 치며 회한의 눈물을 쏟았다.

선비는 문을 열고 “부인~!!”하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신부는 돌리던 물레를 멈추고 신랑을 바라봤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습니다.” 부인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선비는 물레를 돌리던 부인의 손을 잡고 한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요한 적막을 깨고 부인이 조용이 입을 열었다.

“서방님 어찌된 영문인지 연유나 말씀을 좀 해주시지요. 나는 소박맞은 여인으로, 죄인 아닌 죄인으로 20년을 영문도 모른 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더 이상 눈물마저 말라버린 선비는 “부인, 정말 미안하오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소.”하고 그때 첫 날밤의 일을 소상히 얘기하고 용서를 구했다.

새벽닭이 울고 먼동이 떠오를 즈음에 이윽고 부인이 말문을 열었다. “낭군님은 이미 새 부인과 자식들이 있으니 이를 어찌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어서 본가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선비는 부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부인!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늦었지만 내가 당신의 긴긴 세월을 보답할 길을 찾겠소.” 선비는 뜬눈으로 밤새고 그길로 본가로 돌아와 아내에게 20년 전 첫날밤 이야기를 소상히 말했다.

선비의 말을 끝까지 들은 부인은 인자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서방님, 당장 모시고 오세요. 정실 부인이 20년 전에 있었으니 저는 앞으로 첩으로 살겠습니다. 다만 자식들만은 본처의 자식으로 올려주십시오.”

그 인자함에 하염없는 눈물만 흘리던 선비는 이윽고 말을 이었다. “부인, 내가 그리하리다. 부인의 고운 심성을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않겠소이다.” 부인은 남편의 속죄양이 되어 같은 여인으로서 평생을 수절한 심정을 가상히 받아들였다.

선비는 다음날 날이 밝자 하인들을 불러 꽃장식으로 된 가마와 꽃신과 비단옷을 실어 본처를 하루빨리 모셔오도록 명했다.

고사에 나오는 해피엔딩의 옛 이야기다.

하지만 왠지 씁쓸한 뒷맛은 버릴 수 없다. 한 인간의 어리석은 착각으로 이유없이 소박맞은 여인이나 첩을 자처한 정실부인이나 선비에게나 남은 것은 아픔뿐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때려 달라고 죄를 청한다’라는 뜻의 부형청죄(負荊請罪)란 말이 나온다. 전국시대 동료 신하인 염파가 인상여에게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해달라고 자청한다’는 말이다. 이 둘은 이후에 ‘죽음과도 맞바꾼 우정’을 의미하는 문경지교(刎頸之交)란 단어를 만든 사람들이다.

하지만 잃어버린 세월과 그 동안의 고통은 누가 보상해 준단 말인가?

사람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주고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언행에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편집국장 백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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