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유의(居仁由義)...인에 머물고 의를 따르라
거인유의(居仁由義)...인에 머물고 의를 따르라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12.16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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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다녀온 베트남의 기억이 새롭다.

여행이란 그런 맛일까?

예전 같으면 비싼 필름 값 때문에도 사진을 아꼈지만 지금은 무한대로 찍을 수 있는 스마트폰 사진 때문에 여행의 기억이 생생하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응우엔 왕조의 마지막 수도인 고도(古都) 후에에 들러 의아해 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후에성 입구에 진입, 왕궁 중앙의 태화전에 가려면 패방(牌坊:문짝이 없는 삼문)이 있는데 거기에 앞뒤로 커다랗게 쓰여 있던 거인유의(居仁由義)와 정직탕평(正直蕩平)이라는 글자였다.

그곳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도록 새겨져 있다. 왕이든지 신하든지, 국민이든지를 막론하고 말이다.

그 뜻이 궁금해서 귀국 뒤에 자세히 살펴보리라 마음 먹었던 문구였는데 알고 보니 진한 감동이 다가온다.

‘후에’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1802~1945)의 도읍지다. 응우엔 왕조는 200년 동안 남북으로 나뉘어졌던 베트남을 통일하면서 중부지역인 이곳 ‘후에’에 도읍지를 정했다. 이 때부터 오늘날의 베트남 국토가 확정됐고 월남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물론 이 왕조시대엔 중국 한자문화의 영향으로 한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프랑스 식민지시절 만들어진 알파벳을 사용한 베트남 식 문자를 사용한다) 그 뒤 한국과 같이 1945년에 응우엔 왕조가 무너지고 지금의 현대식 정부가 들어섰다.

그런데 이러한 이역만리 베트남 왕궁에 어떻게 우리에게도 생소한 ‘거인유의’가 새겨졌을까?

‘거인유의’란 말은 <맹자>의 <진심 상> 편에 나오는 글이다.

제나라 왕자가 맹자에게 물었다.

“대인은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맹자는 “상지(尙志:뜻을 숭상하는 것)해야 합니다”

왕자가 다시 “상지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맹자는 “인의를 추구하는 것뿐입니다. 인에 머물고 의를 따르는 것이 대인이 할 일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맹자의 인의사상은 <맹자>의 첫 머리인 <양혜왕> 상 편에도 나온다.

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처럼 고명하신분이 천리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주셨으니 우리나라에는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맹자가 말했다.

“왕께서는 왜 꼭 이익만을 말씀하십니까? 중요한 것으로 인의가 있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렇다. 모름지기 왕이라면 이익을 말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의를 좇아야 한다는 충고였다.

바로 이것이 ‘거인유의’의 본말이다.

거인유의(居仁由義)란 인(仁)에 머물고(居:머물 거) 의(義)를 따르면, 대인(大人)이 된다는 뜻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권력과 부를 가지면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도 뉘우치기보다 그 권력과 부로 잘못을 뭉개버리는 특성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맹자는 인에 살고 의를 따르면 대인(大人)의 일이 갖추어진다고 했다. 그럼 대인은 어떤 사람을 대인이라고 말하는 걸까? 역시 맹자의 말을 빌려보자. 대인이란 선(善)으로 자신의 내면을 가득 채워서 실하면서도 겉으로 광채가 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대인은 어떠한 부귀도 그를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어떠한 빈천도 그를 변절시키지 못하며, 어떠한 권력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그런 대인은 도를 얻으면 대중과 함께 그 도를 행하고, 도를 얻지 못하면 묵묵히 홀로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그런 사람을 맹자는 대장부라고도 했다. 대장부가 바로 대인이다.

그러면 궁궐인 태화전을 마주보고 있는 패방에 새겨진 정직탕평의 깊은 뜻은 무엇일까?

두말할 것 없다. 글자 그대로 곧고, 바르게 어느 쪽에도 쏠림 없는 정치를 하라는 뜻이다. 특히 인재등용에 있어서는 지역과 신분, 연줄을 따지지 않는 고른 정책을 펴라는 것이었다.

이 글귀를 정문 중앙의 앞뒤에 새긴 이유는 왕과 관료들에게 문을 드나들 때마다 가슴에 깊이 새기라는 선대 왕의 유지다.

어느 왕조이건 ‘왕이 흩트러진 자세를 보이면 나라가 썩기 시작하고 곧 왕조가 무너진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정치가 또 한번 민의의 심판을 받는 총선이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입지자들이 난립하고 있다.

지금은 볼멘소리로 소중한 표를 가진 국민들에게 읍소하고 낮은 자세로 다가오지만 금배지를 달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파벌주의에 묻혀 민의를 배반하기 십상이다. 날마다 뉴스 첫 머리에 보여주는 여야 간의 집단이기주의적 대치는 대표적인 사례다.

제발 그런 후진국 형 정치가 재발되지 않기를 바란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공부하여 벼슬한 사람은 흔하지만 벼슬한 뒤에도 공부한 사람은 드물다’는 말이 있다.

약 2100년 전에 나온 비유지만 현재까지 하나도 틀림이 없는 명언이다.

당선을 위해 허리가 땅에 닿을 듯이 굽히지만 당선되고 난 뒤에도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히는 그런 현자의 정치가 출현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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