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한 톨의 거짓도 없이 역사를 기록하라"
[편집국 칼럼] "한 톨의 거짓도 없이 역사를 기록하라"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12.30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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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 . . . 조선5백년을 지켜온 直筆을 생각하며

천하의 명군으로 이름난 세종대왕도 아버지 왕인 태종의 업적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몹시 보고 싶었다. 하루는 신하들의 의중을 조심히 살피며 말을 꺼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비록 아버지이지만 형제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탈취한 왕이라는 후세의 비난이 두려웠던 탓이다.

세종이 말했다.

“전대의 왕들이 선왕의 실록을 보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태종께서 <태조실록>을 보지 않고 있는데 <태종실록>을 춘추관에서 이미 편찬을 마쳤으니 내가 한번 보려고 하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떤가?”

이에 우의정 맹사성, 제학 윤회, 동지총제 신장 등이 아뢰기를,

“이번에 편찬한 실록에는 가언과 선정만 실려 있어 고칠 것도 없으려니와 하물며 (명군으로 소문 난)전하께서 이를 고치시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도 이를 본받아 또 고칠 것이며 또한 사관도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후세에 어떻게 진실을 전하겠습니까?”

그 유명한 즉후세무직필야(則後世無直筆也:만일 지금 임금이 사초를 보게 되면 후세에 직필이 없어집니다.)라는 선언이었다.

사관들이 그토록 직필을 고수했다니 참으로 놀랍다.

만 백성의 추앙을 받는 세종대왕이 선대 왕들의 습관을 핑계삼아 그토록 실록을 보고 싶어했어도 사관들은 흔들림 없이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거절의 이유가 ‘이번에 왕에게 사초를 보여주어 한번이라도 고친다면 후세에 어느 사관이 제대로 진실을 기록하겠습니까?’라는 것이었다.

왕이 아무리 명령해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현재의 왕에게 당대나 전대 왕의 사초를 열람하지 못하게 한다’는 한번 원칙이 무너지면 영원히 회복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연산군(재위 1494~1506)도 왕의 자리에 앉아 역사가들이 차후에 나를 어떻게 묘사하여 기록할지 무척 궁금해 했다. 폭군의 이름으로는 기록되고 싶지 않는 탓이었다.

연산군이 1498년 7월 13일 왕조실록 열람에 대해 전교(傳敎:임금이 명을 내림)했다. 몇 차례 열람코자 했으나 관리들이 말을 듣지 않자 특별한 영을 내린 것이었다.

“홍문관, 예문관에서 <실록>을 보는 것이 부당하다고 했는데 평상시라면 이 말이 맞다. 그러나 지금은 큰 일을 상고하려고 하는 것이고 반드시 어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그래도 완강히 불가하다고 하니 의금부에 내려 국문(鞫問:나라에서 중대한 죄인을 심문하는 일)하도록 하여라”

그래도 여러 대간들이 “예로부터 사초(史草:사관이 기록한 사기의 초고)는 임금이 보아서는 안됩니다. 국문이 온당치 않습니다”라며 극구 만류했다. 하지만 연산군은 끝내 듣지 않았다.

연산군과 신하들은 그 뒤로도 사초열람을 두고 보이지 않는 힘 겨루기를 했다. 이른바 사초열람 사건이다. 폭군이라는 절대 권력자 앞에서도 사관들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잠시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고려사>에 나온 이야기다. 고려 우왕은 요즘의 음주운전과도 같은 주취낙마 사건을 겪고 다리가 다쳤다. 그러자 최영 장군의 간언으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가 용수산에서 놀면서 취해 말을 달리다가 떨어지자 최영이 간곡히 간하기를 ‘충혜왕은 색을 좋아했으나 반드시 밤으로 하여 사람이 보지 않게 했고, 충숙왕은 놀기를 좋아했으나 반드시 때를 알고 함으로써 백성의 원망을 사지 않았는데 이제 전하는 노는 것에 법도가 없어서 말에서 떨어져 몸이 상했으니 제대로 보필을 못한 신이 무슨 면목으로 사람을 보겠습니까?”하고 말하니 “지금부터 당장 이를 고치겠다”고 했다.

왕이 사냥을 나가서 말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왕 한 개인의 수치일 뿐 아니라 왕실에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어 철저히 비밀에 붙였던 일이다.

무인의 기질을 자랑하던 조선 태종도 마찬가지다.

“하루는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에서 거꾸러져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훌훌 털고 좌우를 둘러보며 말하기를 ‘물령사관지지(勿令史官知之)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런데 사관들은 ‘사관에게 알게 하지 말라고 임금이 명했다’란 말까지 까발리며 사실을 기록했다.

있는 그대로를 전했던 기록 곧 직필(直筆)의 위대함이다.

사관이 현장을 따라다니며 기록한 사초를 바탕으로 완성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 25대 472년간의 기록으로 1,893권 888책에 달한다. 일찌감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그 방대한 분량에 맞서 그토록 철저한 사실 기록 정신이 있었기에 조선왕조가 5백년을 버텨왔는지도 모른다. 조선왕조는 사초와 실록의 기록으로 어떤 왕도, 어떤 세도가도 피할 수 없었던 역사의 심판을 받아왔다.

밝아오는 2020년, 고언을 기대하며 장성투데이는 좌고우면하지 않는 직필로 독자 여러분에게 다가갈 것을 다짐한다.

/편집국장 백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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