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기삼연 대장은 어떤 인물?
장성 기삼연 대장은 어떤 인물?
  • 장성투데이
  • 승인 2020.02.10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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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奇參衍 1851~1908)

기삼연(奇參衍 1851~1908)선생은 1851년 1월 18일 전남 장성에서 진사 기봉진의 4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호남 유림을 대표하던 기정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그러던 중 1895년 8월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고, 같은 해 10월 단발령이 강제 시행되자 전국에서 본격적으로 의병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선생도 1896년 3월 기우만, 고광순등과 함께 거의하여 장성,나주 등지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광주로 진군하였으나 조정의 설득으로 곧 해산한다.

1904년 전쟁에 필요한 정치적, 군사적 지점을 제공한다는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면서 외교권과 재정권도 서서히 장악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사실상의 준(準)식민지 상태가 되어갔다. 더구나 1907년 8월 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됨에 따라 상당한 전투역량을 지닌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당시 고향에 은거하고 있던 선생은 군대해산 이후 의병항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분연히 동지들과 손을 잡고 일어났다.

1907년 음력 9월 수연산에서 의병봉기의 깃발을 들었던 것이다. 선생은 호남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부대들을 규합하여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연합 의병 지휘부를 결성하고, 통치 편제를 갖추어 항전준비를 완료했다.

편제를 완료함과 동시에 선생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 항쟁을 촉구하면서 병사 모집에 진력하였다. 그리고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봉기 사실을 알리고, <대한매일신보>사에도 글을 보내 의병항쟁을 후원하고 지지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기도 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각 의병장 중심으로 단위부대를 편성한 뒤, 각지로 분산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작전 목표가 정해지면 집결지와 집결일시를 각 부대에 통보하여 양민을 가장하거나 각개 행동으로 집결지에 모이는 방식이었다.

선생이 영도하는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부대가 장성, 고창, 영광 등지에서 기세를 떨치게 되자,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10개 종대로 이른바 ‘폭도토벌대’를 편성하고 탄압에 나섰다.

담양 금성산성과 순창 복흥군 일대를 무대로 일본군과 교전하던 선생은 설날을 계기로 체포되어 하루 뒤인 1908년 음력 1월 2일(양력 2월 3일), 광주 서천교(광주천) 백사장에서 총살형으로 피살되어 58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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