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코로나19, 종교개혁을 명령하고 있다”
[편집국 칼럼] “코로나19, 종교개혁을 명령하고 있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0.03.30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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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류의 위대한 3대 발명품을 말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이면서 소설가이기도 했던 엘리아스 카네티는 그의 저서 ‘군중과 권력’이란 책에서 문자, 정치, 종교라는 세 가지를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대한 발명품이 아닐 수 없다.

원시시대부터 손짓 발짓과 함께 말로만 소통하던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문자’를 만듬으로써 인류 역사는 엄청난 진보를 가져왔다. 인류는 문자로 인해 과거의 문명을 기록하고 그를 발판삼아 진보할 수 있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진화를 거듭했다.

작은 부족 마을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체계와 질서가 필요했던 인류는 ‘정치’를 만들어 냈다. 그럼으로써 계급 사회와 함께 지배자 층이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어둡고 공포스러운 것을 묻어버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조물주이자 심판자인 신을 내세운 ‘종교’를 만들어 냈다. 신의 이름으로 ‘나를 따르라’는 복종을 준칙으로 삼고 있다. 천당과 지옥으로 구분되는 사후 세계의 보장은 종교가 가진 최고 가치의 컨텐츠였다.  

이 3대 발명품은 앞으로도 인류가 집단을 이뤄 살아가면서 만나야할 필연적인 수단일지도 모른다. 

이 종교가 우리사회를 혼동으로 몰고 있다.

도대체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이란 게 무엇인가?

보통의 교회에서 그토록 부르짖는 그리스도와 메시아는 어느 나라에서 어떻게 온다는 것인가?

특정 종교를 비판하려는 의도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한국의 독특한 지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도올 선생은 ‘나는 예수입니다’라는 책을 펴내며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도올은 원래 신학자를 꿈꾼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라는 이름으로 더 가치를 빛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예수는 민중운동가이자 혁신가이며 휴머니스트다’라고 정의했다. 예수는 가난하거나 병든 자,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 등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렇기에 예수가 가장 소중히 여긴 계율의 하나가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였다.

그래서 지금도 이러한 계율을 전면에 내세우는 교회에 수많은 억압받는 약자들이 먼저 찾아온다.

그런데 정작 교회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닌, 의무를 강요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요즘같이 코로나19 전염병이 창궐하는데도 주일예배에 집착하며 사람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약한 이웃을 사랑과 배려로 감싸는 게 아니라 약하고 험한 세상일수록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부추기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에 나와 기도하고 경배하라’고 외치는 저의는 무엇일까?

조금 이성을 차리고 “그토록 전지전능한 신이 돌봐주신다면 코로나19로 왜 수많은 어린양들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교회 측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사랑이란 사람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는 의도 역시 인간에 대한 무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19가 더 이상 번지지 않게 협조하고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가장 큰 사랑의 실천이다. 계율을 강조하며 교회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외면한 ‘신만을 위한 도구 삼음’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도올 선생은 교회의 환골탈퇴를 주장한다. 안식일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다르다.

“유대교 율법상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 배가 고파 밀 이삭을 훑어 먹는 제자들을 보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항의하는 바리새인들을 위해 예수는 선언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은 안식일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다.”

그렇다.

공동체사회를 지향하는 인류를 유지하게 만드는 원천의 하나가 종교다. 하지만 그 종교에 인간이 함몰돼서는 안 된다. 종교를 위한 종교가 돼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사람을 사랑하는 종교가 돼야한다.

나약한 영성을 호도하여 재림예수를 흉내 내거나 영생불멸을 사칭하지는 않았는지, 종교를 빌미로 복전함을 앞세우거나 헌금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직업으로 목회자를 세습하고 있지는 않는 지 냉정하게 뒤돌아보길 바란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順天者興 逆天者亡)’고 했다. 하늘의 이치를 따르면 일어나고 거역하면 망한다.

지금 코로나19의 거침없는 확산으로 대재앙의 지구를 맞아 세계 모든 인류가 경제파탄과 함께 수만 명이 날마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 지금 지구에 신의 가호를 기도하는 종교가 의미가 있는가?

이런 절망적 광경에서 종교는 더욱더 할 말이 없을 듯하다.

종교가 생각의 변화를 시작해야한다. ‘메타노이아(Metanoia)’라 했다. ‘회개, 회심의 신심으로 큰 삶의 공동체 구현에 동참하라’는 메시지다.

역경의 시대를 뛰어 넘어 새로운 세상을 맞으려는 변화를 종교가 먼저 시작해야 한다.

/백형모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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