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덜 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우덜 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 최현웅 기자
  • 승인 2018.04.17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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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많고 의리 있는 ‘한량’
무슨 일이든 척척 마을‘홍반장’
편백향 가득한 힐링마을 모암
서삼면 모암 2리 송소부 이장
모암2리 송소부 이장
모암2리 송소부 이장

“장성에서 나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여” 장성투데이가 모암 2리 송소부(75세) 이장을 찾은 날 기자는 꼼짝없이 간첩이 되고 말았다. 송 이장은 지금도 읍내에 나오면 아는 체 인사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귀찮을 지경이란다. 소싯적에 ‘의리’하면 송 이장, 언제든 어디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는 자칭·타칭 내로라하는 ‘홍반장‘이다.

지금도 새까만 머리에 작지만 건장한 체구, 구릿빛 피부와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걸이는 누가 보더라도 70대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비결을 묻자 송 이장은 이게 다 양봉을 하며 좋은 거 많이 먹고 수시로 산에 오르며 가끔 봉침도 놓고 하니 건강하다 하신다. 지금도 산에서 먹고 자면서 거침없이 산행을 하다 보니 웬만한 젊은이들 체력 못지않다고.

“지금도 멋진데 젊었을 땐 여자분들이 많이 따랐을 것 같아요”라니까 송 이장은 “지금 한창 유행인 미투 운동을 생각해서 말하자면 지금껏 단 한 번도 여자 손목 한번 잡은 적도 없고 마누라 말고는 마음을 준적도 없다”고 한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부모님 모시고 고생한 아내와 잘 자라준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편과 아비로 살아왔다는 송 이장. “그래도 나는 마누라밖에 없어. 일편단심이여”라고 재차 답한다. 그것이 송 이장에겐 의리라고.

44년생. 그러니까 해방되기 한해 전에 태어났다. 송 이장의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일본 순사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순사를 해하고 만주로 도피했다 한다. 그런데다 송 이장의 아버지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그곳 일본 열도에서 송 이장을 낳았다고. 해방이 되고 난 이듬해 갓난쟁이였던 송 이장을 품고 처음 자리 잡은 곳이 장성 동화면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가진 것 하나 없이 장성 시골마을에 들어와 안 해 본 것 없이 억척스럽게 살아왔다고. 먹을 게 없어 어머니랑 같이 산에서 나무를 캐다 나무껍질을 벗겨 장에 내다 팔던 가난했던 어릴 때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신다.

그래서 그런지 송 이장은 지역에서도 알아주는 효자다. 지난 2001년에는 3대가 같이 당시 91세 노부를 모시면서 보살피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뒷바라지하면서도 화목하게 살아 이웃들의 칭송이 자자하다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전남 최초 통나무집
전남 최초 통나무집

서삼면 이장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송 이장은 올해로 이장은 3년째지만 중간에 몇 년 쉬었던 거 빼고는 80년대부터 마을의 대소사는 물론 온갖 잡다한 일들은 언제나 송 이장의 몫이다. 실질적 이장 노릇은 다 했다고.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통나무집이지만 당시 전남 최초로 들여온 장본인도 바로 송 이장이다. 송 이장에 따르면 2001년 당시 산림청의 협력을 얻어 통나무집 건립추진 위원장을 맡아 이 마을에 4동을 지어 마을에 공동 위탁했었다 한다. 당시 재료는 100% 토종 우리나라 낙엽송으로만 제작했다고. 이젠 이 통나무 펜션이 축령산 편백숲을 찾는 여행객과 유명 블로그들의 입소문을 타고 유명세를 탄지도 오래다.

그뿐이랴 통나무집이 유명세를 타고나서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펜션이 하나둘 알려지기 시작하며 이제는 마을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곳 모암은 마을 뒤쪽 공동산과 매남봉 사이에 있는 용소 절벽에 모암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마을 이름을‘모암’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엔 또 장성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모암서원이 있다. 모암서원은 1587년(선조 20년)에 장성현감 이계가 절효공 서능 선생의 학문과 효행을 존모 하는 유림들의 공의에 따라 선생이 초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던 유허지 부근에 사당과 강당을 세워 모암서원을 창건했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1648년(인조 26년)에 중건하였으며 1667년(현종 8년)에 조영규, 조정효 부자를 배향하였다. 그 후 1698년(숙종 24년)에 표정 최학령, 1758년(영조 34년)에 하곡 정운용과 추담 김우급, 1788년(정조 12년)에 아곡 박수량을 각각 추가 배향했다.

사당의 중앙에는 서능 선생, 좌측에는 박수량·조영규·조정효 부자, 우측에는 정운용·최학령·김우급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는데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1909년(순종 3년)에 김학수, 최봉석 등이 중심이 되어 옛터에 <모암서원단기적비>를 설치했다.

이후 1932년 서후창 등이 주축이 되어 북일면 성덕리 용전동에 절효공만을 녹향하는 단을 설치하였고, 1933년에는 해서·관동과 호남 별읍의 협력을 얻어 모암서원에 배향된 칠현의 위패를 한 곳에 배향하고 용전단(또는 용전사, 모암사현단)이라 칭하였다. 그 뒤 몇 차례 사우건립을 도모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고 용전단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불탔다가 1962년 단이 복설되었다. 7위의 단비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의 호패형(戶牌形)이다. 서릉은 고려 고종 때의 이름난 효자로 자는 대방, 본관은 이천이다. 박수량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莪谷)이며 시호는 정혜공(貞惠公)으로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장성 최초 서원인 모암서원과 칠현유적지
장성 최초 서원인 모암서원과 칠현유적지

 

옛 모암서원터인 서원 뜸 223번지에 위치한 <모암칠현단>은 전라남도 사적 제9호, 문화재자료 119호(1984년)로 지정됐다.

“장성에서 나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여” 장성투데이가 모암 2리 송소부(75세) 이장을 찾은 날 기자는 꼼짝없이 간첩이 되고 말았다. 송 이장은 지금도 읍내에 나오면 아는 체 인사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귀찮을 지경이란다. 소싯적에 ‘의리’하면 송 이장, 언제든 어디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는 자칭·타칭 내로라하는 ‘홍반장‘이다.

지금도 새까만 머리에 작지만 건장한 체구, 구릿빛 피부와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걸이는 누가 보더라도 70대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비결을 묻자 송 이장은 이게 다 양봉을 하며 좋은 거 많이 먹고 수시로 산에 오르며 가끔 봉침도 놓고 하니 건강하다 하신다. 지금도 산에서 먹고 자면서 거침없이 산행을 하다 보니 웬만한 젊은이들 체력 못지않다고.

“지금도 멋진데 젊었을 땐 여자분들이 많이 따랐을 것 같아요”라니까 송 이장은 “지금 한창 유행인 미투 운동을 생각해서 말하자면 지금껏 단 한 번도 여자 손목 한번 잡은 적도 없고 마누라 말고는 마음을 준적도 없다”고 한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부모님 모시고 고생한 아내와 잘 자라준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편과 아비로 살아왔다는 송 이장. “그래도 나는 마누라밖에 없어. 일편단심이여”라고 재차 답한다. 그것이 송 이장에겐 의리라고.

44년생. 그러니까 해방되기 한해 전에 태어났다. 송 이장의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일본 순사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순사를 해하고 만주로 도피했다 한다. 그런데다 송 이장의 아버지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그곳 일본 열도에서 송 이장을 낳았다고. 해방이 되고 난 이듬해 갓난쟁이였던 송 이장을 품고 처음 자리 잡은 곳이 장성 동화면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가진 것 하나 없이 장성 시골마을에 들어와 안 해 본 것 없이 억척스럽게 살아왔다고. 먹을 게 없어 어머니랑 같이 산에서 나무를 캐다 나무껍질을 벗겨 장에 내다 팔던 가난했던 어릴 때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신다.

그래서 그런지 송 이장은 지역에서도 알아주는 효자다. 지난 2001년에는 3대가 같이 당시 91세 노부를 모시면서 보살피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뒷바라지하면서도 화목하게 살아 이웃들의 칭송이 자자하다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서삼면 이장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송 이장은 올해로 이장은 3년째지만 중간에 몇 년 쉬었던 거 빼고는 80년대부터 마을의 대소사는 물론 온갖 잡다한 일들은 언제나 송 이장의 몫이다. 실질적 이장 노릇은 다 했다고.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통나무집이지만 당시 전남 최초로 들여온 장본인도 바로 송 이장이다. 송 이장에 따르면 2001년 당시 산림청의 협력을 얻어 통나무집 건립추진 위원장을 맡아 이 마을에 4동을 지어 마을에 공동 위탁했었다 한다. 당시 재료는 100% 토종 우리나라 낙엽송으로만 제작했다고. 이젠 이 통나무 펜션이 축령산 편백숲을 찾는 여행객과 유명 블로그들의 입소문을 타고 유명세를 탄지도 오래다.

그뿐이랴 통나무집이 유명세를 타고나서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펜션이 하나둘 알려지기 시작하며 이제는 마을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곳 모암은 마을 뒤쪽 공동산과 매남봉 사이에 있는 용소 절벽에 모암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마을 이름을‘모암’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엔 또 장성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모암서원이 있다. 모암서원은 1587년(선조 20년)에 장성현감 이계가 절효공 서능 선생의 학문과 효행을 존모 하는 유림들의 공의에 따라 선생이 초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던 유허지 부근에 사당과 강당을 세워 모암서원을 창건했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1648년(인조 26년)에 중건하였으며 1667년(현종 8년)에 조영규, 조정효 부자를 배향하였다. 그 후 1698년(숙종 24년)에 표정 최학령, 1758년(영조 34년)에 하곡 정운용과 추담 김우급, 1788년(정조 12년)에 아곡 박수량을 각각 추가 배향했다.

사당의 중앙에는 서능 선생, 좌측에는 박수량·조영규·조정효 부자, 우측에는 정운용·최학령·김우급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는데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후 1909년(순종 3년)에 김학수, 최봉석 등이 중심이 되어 옛터에 <모암서원단기적비>를 설치했다.

이후 1932년 서후창 등이 주축이 되어 북일면 성덕리 용전동에 절효공만을 녹향하는 단을 설치하였고, 1933년에는 해서·관동과 호남 별읍의 협력을 얻어 모암서원에 배향된 칠현의 위패를 한 곳에 배향하고 용전단(또는 용전사, 모암사현단)이라 칭하였다. 그 뒤 몇 차례 사우건립을 도모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고 용전단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불탔다가 1962년 단이 복설되었다. 7위의 단비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의 호패형(戶牌形)이다. 서릉은 고려 고종 때의 이름난 효자로 자는 대방, 본관은 이천이다. 박수량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莪谷)이며 시호는 정혜공(貞惠公)으로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옛 모암서원터인 서원 뜸 223번지에 위치한 <모암칠현단>은 전라남도 사적 제9호, 문화재자료 119호(1984년)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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