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상실된 ‘부부의 날’…“살아 있을 때 뜨겁게 사랑하라”
[편집국 칼럼] 상실된 ‘부부의 날’…“살아 있을 때 뜨겁게 사랑하라”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0.05.25 10: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치매로 눈물진 백건우 윤정희 부부를 보며

수목이 잔잔한 유럽풍의 넓다란 정원.
어둠이 내린 석양 노을에 슬픈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얕은 움직임의 한 여인이 선율을 감상하듯 의자에 기대고 있다.
느닷없이 묻는다.

“여보, 다음 촬영은 어디로 가?”
“아냐~ 가긴 어딜가 그냥 집에 있는거야~”

지긋이 감긴 여인의 시선은 힘없이 하얀 대리석에 꽂힐 뿐...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그냥 맥없이 끄덕였다.
해가 저물면서 건반을 두드리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도 그쳤다.
아, 이젠 내 사랑하는 아내를 침대로 이동시켜야 할 시간이구나...

프랑스 파리의 한 야외 주택가에 머물고 있는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75)와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 윤정희(76) 부부의 최근 동향이다. 

딸 백진희 양을 따라 프랑스 주택가에 머물고 있다는 윤정희.

그가 10년 전부터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 5년 전부터는 그 정도가 심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제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연주복을 싸서 공연장으로 가는데 우리가 왜 가고 있냐고 묻더군요. 그런데 무대에 올라가기까지 한 100번은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식입니다”

백건우 씨가 그녀의 치매 초기 증상을 알고 세계무대를 누비면서 여러 번 동행하며 겪은 슬픈 고백이다.

그녀의 나이 32세에 결혼하여 44년을 살면서 ‘윤정희 없는 백건우는 있을 수 없다’는 소문처럼 잉꼬부부로 소문 난 그들이었지만 알츠하이머란 침략자 앞에선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딸 백진희는 “내가 ‘엄마’ 하면 ‘나를 왜 엄마라 부르냐’고 되묻습니다. 딸 마저 못 알아볼 때 그 심정은 어떻겠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영혼마저 빼앗아 가버린다는 불치의 병 치매.

정말 어떻게 할 수도, 어찌 마다할 수도 없는 악마의 저주다.

아무리 화려했던 과거도 불타버린 편지 한 장으로 단숨에 날려버리는 비정한 쓸쓸함 그 자체다. 그래서 누군가 말했다. 그건 행복 끝, 불행 시작이라고.

백건우 씨는 “몇년 전까지도 내 연주 여행 때문에 전 세계를 함께 데리고 다녔다. 아내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니까 할 수 있는 한 간호를 다해왔다. 하지만 본인이 너무 힘들어 했다. 환경이 계속 바뀌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서울인지, 파리인지, 왜 여기에 있는 지를 모르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안쓰럽고 안 된 그녀를 위해 가장 편한 환경을 만들어줬다. 파리의 딸 집 옆에 주택을 얻어 살도록 했던 것. 그리고 설령 그녀가 다시 돌아오든 못 돌아오든, 그녀를 향한 사랑의 피아노는 계속 그녀 곁에서 울리기로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2010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시’였다. 당시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를 보이던 윤정희는 영화에서도 알츠하이머 환자를 연기했다.

자신의 미래를 예상한 듯, 영화에서 했던 주인공 연기처럼 알츠하이머 환자로 낯선 이국 파리의 주택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한국 최고의 여배우.
70년대와 80년대 영화사에서 그녀는 은막의 여왕이었다. 무려 33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해 거의 주연급 연기에 발탁되면서 그의 미모와 연기력을 당대에 과시했다. 영화 ‘자유부인’ 시리즈 등에서 보여준 그녀의 미모와 매력은 미국의 명배우 마릴린 먼로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과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녀의 뜨거웠던 가슴에 이제 차가운 망각의 피만 흐르는데...

엊그제, 21일은 부부의 날이었다.
백건우 윤정희 부부에게서 배운다.
“살아 있을 때 뜨겁게 살라”고…                                                                    
                                                                                 /편집국장 백형모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