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장성에 백마장군 기삼연 선생 동상을!
[특별기고] 장성에 백마장군 기삼연 선생 동상을!
  • 장성투데이
  • 승인 2020.11.1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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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제(사단법인 한말호남의병기념사업회이사장•국가보훈위원회 위원)

의향 장성이 한말호남의병의 총사령관을 그대로 묻을 것인가?

 

“이곳 광주천변 모래사장은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한말호남의병 대장으로 추대된 기삼연의병장이 설날이던 1908년 2월 2일 순창에서 체포되어 광주로 호송된 후 재판 없이 총살된 현장이다.”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부동교 인근 작은 표석에 새겨진 글귀다. 오석으로 세워진 표석은 지난해 광주시가 독립운동사적지 표석 사업을 추진하며 광주3•1운동 만세 시위지에 새로 건립했다.

호남창의영수(湖南倡義領袖) 기삼연(奇參衍)은 조선말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호남의 의병부대를 모아 총사령부를 구성한 불세출의 선비다. 그는 한말 호남을 무대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의병전쟁을 시작하였으며 따르던 선비는 한 손에는 붓을, 또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싸웠다. 무기를 구하지 못한 백성은 농기를 들고 일제와 맞섰다. 그만큼 그는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당시 전라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동요가 유행했다.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같다 전해산

잘싸운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노래에 등장하는 이들은 당시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까지도 우상으로 여겼던 의병장들이다. 기삼연은 한말 호남의병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김죽봉은 김준(金準, 金泰元)을, 안담살이는 안규홍(安圭洪), 박포대는 기삼연 의진의 포대 박도경(朴道京)이다.

백마장군으로 잘 알려진 기삼연 의병장은 1851년 전남 장성에서 진사 기봉진의 4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성재(省齋)이며, 자는 경로(景魯)다. 전통적인 유가 가문으로서 일찍이 노사 기정진에게 글을 배웠는데, 재주가 빼어나 노사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특히 병서(兵書)를 겸해 공부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2월 장성에서 조카 벌되는 기우만과 함께 거의하였다. 그는 스스로 군무(軍務)를 담당하여 백마를 타고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고 불렀다.

1896년 정부 회유 등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면서 1차 의병에 실패한 기삼연은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9월에 장성군 황룡면 수연산 석수암(石水庵)에서 다시 의병을 모았다.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한 것이다. 기삼연은 호남일대를 무대로 본격적인 의병전쟁에 돌입했다.

기삼연은 무장 법성포 고창 장성 등지를 주무대로 삼았다. 1907년 9월 23일, 고창 문수사(文殊寺)전투에서 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것을 비롯하여 1908년 1월 말까지 전라도 일대에서 40여 회의 전투를 벌여 일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장성공원에 세워진 기삼연 선생 순국비
장성공원에 세워진 기삼연 선생 순국비

 

기삼연은 1908년 1월 말(양력), 나주 고막원을 공략하려다가 너무 춥고 명절이 가까워 의진을 이끌고 담양 금성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험준한 지형이라 설을 쇨 계획이었다.

그러나 밤에 큰 비가 내려 노숙하는 병사들의 옷이 젖어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있을 때 수비의 허술함을 틈타 적이 불의에 내습 공격하였다. 피아간 4, 50명의 많은 사상자를 낸 격전 끝에 결국 완전 포위당하였다. 기삼연은 최후를 각오하고 의관을 정비하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안개가 내려 깔려 요행히 의진을 이끌고 북문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탈출한 기삼연은 순창 복흥산으로 들어갔다. 부상으로 의병 활동의 한계를 느낀 기삼연은 장졸들에게 각각 집으로 돌아가 설을 쇠고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해산명령을 내렸다.

기삼연은 구수동 촌가에 잠복하여 설을 맞았으나 이날 아침 일군 추격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담양을 거쳐 광주로 압송되어 가는데, 길에서 보는 이들이나, 교차를 메고 가는 이들이 눈물을 흘려 길이 지체되었다. 광주 감옥에 수감된 기삼연은 자신의 참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

(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

애초, 그의 꿈은 해를 삼키려고 한, 곧 일제를 패망시키는 데 있었다. 하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다.

기삼연은 결국 순창에서 체포된 이튿날인 1908년 1월 2일(음력) 광주 서천교 밑 백사장에서 일제에 총살로 순국하였다.

그러나 기삼연 의병장 사후에도 그의 산하에 있었던 부장들이 독립된 의진을 형성하여 호남 일대에서 일본군경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준(김태원) 전수용(전해산) 이석용 오성술 조경환 심수택(심남일) 등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독립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지금도 찬란한 별이다. 하지만 순국112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를 기리는 기념사업은 거의 없다. 장성공원에 기삼연 순국비가 건립되어 있으나 비문을 쓴 사람이 친일 논란에 휩싸여 그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오히려 가리고 있다. 광주 순국 터에 달랑 표지석 하나가 그나마 그를 기억케 하고 있는 현실.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픈 이 시대의 민낯이 아닐 수 없다.

그를 배출한 장성에 백마장군 기삼연 선생의 동상을 세우자.

의향 장성이 한말호남의병의 총사령관을 그대로 묻을 작정이 아니라면 더 늦기 전에 동상을 세워 그의 정신을 영원히 기려야 마땅하다. 최근 총사령부를 결성하였던 석수암 터가 발견되면서 기삼연 선생에 대한 기념사업의 당위성은 더욱 높아졌다.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기념사업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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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일 2020-11-16 19:26:28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우리는 어찌하여 암흑 같은 일제 치하에서

무릎 꿇리고 죽임을 당하는 민족을 구하고

민족의 정기를 떨친 구국 항쟁인 의병전쟁

의 선봉장 기삼연 대장의 흉상하나도 없는

오랜 세월을 보냈어야만 했었나?

아무리 정의가 실종된 한심한 세월이었었다

치드라도 이건 너무도 낯 부끄러운 역사일뿐

이제 비록 늦었다고는 하나 조국 과 민족을

위하여 일신의 영화 따위를 초개와 같이 떨쳐

버린채 풍찬노숙으로 장렬히 산화하신 애국

선열 분들의 큰뜻은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는

반성하에 하나 하나 정신차려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그것은 후손들에게는 자부심을 일깨우는 교육의

일환이기도 하고 민족의 미래를 탄탄하게 만드는

후대들이 꼭 하여야 할 당연한 일이기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