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어떻게 친일사학자가 기삼연 의병장 비문을 썼나?
[12월 14일]어떻게 친일사학자가 기삼연 의병장 비문을 썼나?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0.12.14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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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공원에 이선근이 남긴 기념 비문 ‘버젓이’

이선근–대표적인 민족정기 왜곡 ‘친일 사학자’

박정희 유신 찬양으로 권력지향...‘후세에 오욕’

한말 호남지역의병운동 연합부대인 호남창의회맹소를 이끌었던 기삼연 의병대장의 순국비문을 대표적인 친일사학자 이선근씨가 새긴 것으로 뒤늦게 알려져 지역사회를 놀라게 하고 있다.

현재 충혼탑이 서 있는 장성공원 한 쪽에 위치한 순국비문은 ‘호남창의영수 기삼연선생순국비‘라고 명명돼있고 ‘호남창의영수 성재기삼연선생 순국기념사업회건립’이라고 추진단체가 명기돼있다. 건립 연도는 1966년이다.

장성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호남창의영수 기삼연선생순국비’의 위용. 옆면의 비문 안에 새겨진 ‘이선근 근찬’이라는 표기가 선명하다.
장성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호남창의영수 기삼연선생순국비’의 위용. 옆면의 비문 안에 새겨진 ‘이선근 근찬’이라는 표기가 선명하다.

이 비문의 한면을 차지하는 행적과 의의를 쓴 사람이 ‘문학박사 이선근 근찬(李瑄根 謹撰)’이라고 표기돼 있다.

문제는 이선근이란 사람이 친일행적과 역사 왜곡 만행,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독재 정권에서의 민적정기 말살행위를 수없이 자행한 인물이란 점이다.

이선근은 이병도 등과 함께 실증사학을 추구, ‘민족운동의 수단으로서의 역사연구’를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만을 보아야한다’는 ‘역사를 위한 역사’를 강조해 왔다.

이선근(1905~1983)은 경기도 개풍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에 유학, 그곳에서 조선침략 주창자인 케무야마 교수를 만난다. 이선근은 만주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귀국해서 이승만을 총재로 모시는 대동청년단을 창설, 정치에 뛰어든다. 결과적으로 권력에 빌붙어 1954년에 문교부장관과 국사편찬위원장, 78년에 정신문화연구원 초대원장 등 수많은 직책을 갖고 활동한다.

이와동시에 식민사관 정립을 위해 화랑도연구 등에 몰두하며 박정희와 교분을 넓힌다.

이선근이 저술한 《한민족의 국난극복사》의 마지막에는 “박정희가 국가 비상사태 선언이나 유신을 선포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무위무능하고 중책을 다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것”이라며 ‘10월 유신’을 극찬한다. 그가 남긴 56권의 저서들 대부분 식민사관에 입각한 역사 왜곡이 심하다.

현재로선 이선근이 54년 전, 어떻게 장성공원의 기삼연 대장의 비문을 쓰게 됐는지 정확히 알 기 어렵다. 다만 비석 제작 무렵, 역사학계나 추모사업 추진 과정에서 무시못할 존재였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공영갑 전 장성문화원장은 “그 경위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장성이 그 인물 됨됨이와 사적기 편찬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역사에 무안할 뿐이다”고 말했다.

이선근은 <湖南 全域에서 民族魂의 血鬪를 展開하여 數千의 倭敵을 屠殺하였으니 오늘의 祖國 大韓民國을 爲해서도 先生이 남기신 피의 業績과 遺訓은 길이 靑史에 빛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라고 비문을 마무리 짓고 있다.

얼마나 진심에서 나온 기삼연 선생의 추모글인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장성 정신의 상징인 기삼연 선생의 행적과 의의에 더 이상 누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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